취리히 미술관은 건물부터, 컬렉션까지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을 선사해준 미술관입니다. 고전부터 21세기 미술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걸작이 가득한 엄청난 상설전시의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동시대 미술 특별전도 야심만만한 규모였습니다. 특히 몰입형 전시와 디지털 아트에 이렇게 적극적인 현대 미술관도 보기 드물겁니다. 한 미술관이 이토록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는 건 정말 오랜만의 만남인 것 같습니다.
비결이 있습니다. 바젤과 마찬가지로 예술애호가들의 열정과 기부였습니다. 취리히 미술관은 애초에 왕궁 컬렉션이 아닌 소규모의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 그룹을 통해서 시작됐습니다. 1787년에 설립된 예술가협회(Künstlergesellschaft)는 1794년부터 미술 작품을 수집해 전시를 열었습니다. 기부된 미술품을 소장하는 미술관을 1840년대부터 갖게 됐고, 1917년 페르디낭 호들러의 전시를 계기로 취리히 예술친구들 협회(Vereinigung Zürcher Kunstfreunde)가 설립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바젤의 샤울라거를 비롯해서 스위스에서 가장 존재감이 뚜렷한 건축가는 헤르조크&드 뫼롱입니다. 하지만 취리히에선 아닙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이 놀라운 미술관에서도 아모레퍼시픽 사옥과 흡사한 외관 마감과 65미터의 정사각형 평면까지 익숙한 건축 마감을 보여줍니다. 2021년 완공된 이 건물로 취리히 미술관은 네 차례의 증축을 거 스위스 최대 미술관이 됐습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는 두 개의 건물을 쓰고 있는 이 미술관은 겉보기와는 달리 어찌나 방대한 컬렉션과 전시를 꽁꽁 숨겨놓았던지, 이 곳에서만 반나절을 꼬박 쓰고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특별전만 마르셀 뒤샹의 누이인 수잔 뒤샹, 로비에서 전시 중인 제프리 깁슨, 몬스터 체트윈드, 로만 지그너까지 네 개의 기획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습니다.
치퍼필드관에 들어서자 마자 1972년생 미국 원주민 작가로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전시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제프리 깁슨의 거대한 설치 작품이 로비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차 없이 동시대 미술과 소통하는 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었죠.
치퍼필드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질문'입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르누아르의 <이렌느 깡 단베르의 초상>(1880)는 작가의 가장 훌륭한 초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 걸작입니다. 그림을 의뢰한 소녀의 어머니는 집에 그림을 걸어두고 감상했죠.
이 소녀는 가족과 함께 나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통과 상실과 애도가 모두 담긴 비극적인 작품인 셈입니다. 스위스 사업가 에밀 뷔를레는 전쟁으로 큰 돈을 번 무기 제조업자이자 미술품 수집가로 1949년 이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전후 나치 약탈품은 주인에게 돌려줘야했지만 이미 주인이 사라진 많은 그림들은 부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뷔를레가 기부를 하면서, 이 그림은 공공 미술관에서 모두가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됐죠.
취리히 미술관은 전쟁에서 돈을 벌어 논란이 된 많은 부호들의 기증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미술관입니다. 미술관은 이 뷔를레 컬렉션을 비롯해 기부된 작품의 소장 과정을 고스란히 공개하면서 기증 미술품의 소유와 보존, 그리고 감상의 권리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심지어 소유 논란이 있는 폴 고갱, 툴루즈 로트렉, 반 고흐, 클로드 모네의 그림 5점은 액자를 철수한 채 빈 공간만을 전시합니다.
에밀 뷔를레 컬렉션의 인상주의 외에도 가브리엘레와 베르너 메르츠바허 컬렉션의 야수파 및 표현주의 작품, 휴버트 루저 컬렉션의 미국 추상화 등 취리히 미술관의 많은 걸작들이 기부를 통해 미술관의 소유가 됐습니다. 미술관에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두었습니다.
치퍼필드관에서 가장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두 작가는 페르디낭 호들러와 조반니 사간티니입니다. 호들러는 바젤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도 초대형 벽화를 두 점이나 그렸습니다. 여러 여인과의 미친듯한 사랑을 하면서 죽음과 사랑을 주제로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던 화가입니다.
스위스 대표 화가답게 알프스의 풍광을 반복해 그렸던 그는 대규모 군상이 등장하는 벽화도 여러점 남겼죠. 바젤 미술관과 취리히 미술관의 벽에 그려진 동일한 도상의 <무한을 향한 시선> 속 여인들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과는 달리 반복적인 몸짓을 통해 초월적인 감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와 나란히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간티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일생을 알프스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헌신했습니다. 스위스에서 만난 알프스의 풍경을 그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어김없이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치퍼필드관 최고의 인기 장소는 어두컴컴한 방입니다. 스위스 예술가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투리쿰 픽셀발트(Turicum Pixelwald)'(2021)는 21세기 관람객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줍니다. 3,000개의 LED 조명이 6곡의 몽환적인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듯 빛을 발하는 방은 말그대로 오감을 모두 사용해 미술을 만나는 곳입니다. 바닥에 눕거나 벽에 기댄 체 한참을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복도에 별도의 방이 마련된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작품도 인기가 많습니다. 작은 방에 기증을 받아 2026년까지 전시될 예정인 <Glacier Dreams>는 1억 개 이상의 이미지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남극의 빙하를 담은 1,000만 개 이상의 시각 자료를 데이터로 사용해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낸 영상입니다. 쉽게 녹아서 사라지는 빙하의 연약함은 매혹적인 이미지로 변주됩니다.
본관의 기능을 하는 모저관에서는 상설 전시와 특별 전시가 모두 열립니다. 상설 전시에서는 스위스 국민 작가들의 엄청난 컬렉션을 끝없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자코메티, 알버트 앙커, 하인리히 퓌슬리, 아르놀트 뵈클린, 펠릭스 발로통은 취리히 미술관이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스위스 미술을 만나려면 취리히에 직접 와야하는 이유입니다.
이 작가들을 만나면서 이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토록 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쏟아졌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알프스와 호수를 거닐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자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요. 발로통의 묘한 색감과 인물화의 구도를 보면서는, 그의 영향을 받은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그림이 연상되어 흥미로웠습니다.
에드바르 뭉크는 여기가 노르웨이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가 걸려있고, 독일 표현주의 거장 게오르그 바첼리츠의 초기작도 여러점 있어 반가웠습니다. 특히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 수십 점이 영구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후 인류의 비극의 화폭에 표현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삼면화와 나란히 전시된 자코메티의 성마른 조각들은 묘한 울림을 주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