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5월에 다녀온 파리 여행을 이제서야 복기해봅니다. 파리는 반년 만의 여행이었는데, 이번엔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튈르리 정원을 지나는데 봄바람이 불고 꽃이 만발한 모습이 정말 근사하더군요.
이번 여행에서 저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데이비드 호크니, 수잔 발라동 등을 만났습니다. 미술관 전시 외에도 2박3일 동안 10개가 넘는 전시를 숨이 가쁘게 만나고 왔는데요. 이걸 어떻게 다 소개해야할지 골치가 아프네요. 😹
47회 (2025. 7.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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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튈르리 정원. 햇볕이 벌써 뜨거워져서 짙게 내려앉은 구름이 반가웠던 날이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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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파리에 이렇게 작고 예쁜 미술관이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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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마르 앙드레 미술관. 1세기전 저택이지만 보존 상태가 정말 훌륭했고, 내부의 화려함은 영국에선 비견할 건축물이 없어 보였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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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의 극치인 피렌체 갤러리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이 여러점 걸려있다. ©김슬기 |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볼 수 있는 벽화. Giambattista Tiepolo <Henri III being welcomed to the Contarini Villa>, 1745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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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첫 미술관은 정말 예상외로 아름답고 놀라운 공간이었습니다. 20여개가 넘는 대형 미술관이 있는 이 도시에서 저도 처음 방문한 곳이었는데요.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전시가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공간입니다.
자크마르 앙드레 미술관(Musée Jacquemart-André)은 19세기 말에 오스만 남작이 도시계획을 세워 새롭게 건축된 파리에 지어진 개인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든 곳입니다. 19세기의 전통적인 귀족 저택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설립 배경은 런던의 켄우드 하우스와 무척 비슷한데요. 그 화려함은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두아르 앙드레(Edouard André,1833~1894)는 프랑스 남동부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엘리트 장교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그는 1860년부터 금과 은제품, 보석류, 도자기 제품, 미니어처, 태피스트리 등 소품으로 컬렉션을 시작했죠. 점차 바르비종파의 들라크루아, 풍경화 같은 예술가들의 그림을 구입하며 관심사를 넓혀갔습니다.
앙드레는 오스만 대로의 땅을 구입해 저택을 짓습니다. 앙리 파렌트(Henri Parent)는 샤를 가르니에의 라이벌이었고 오페라 하우스를 라이벌에게 빼앗기자, 이 저택을 더 화려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죠. 1869~1876년 사이에 그는 고전주의적인 이 건축물을 완성했고, 이중 나선형 계단과 호화로운 실내 장식은 저택이 공개됐을 때 찬사를 받았습니다.
에두아르 앙드레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정하고 성공적인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은 젊은 예술가 넬리 자크마르(Nélie Jacquemart, 1841~1912)에게 의뢰를 합니다. 이를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1881년 결혼합니다. 두 사람은 자녀를 낳지 않고 공통의 열정인 예술 수집에 전적으로 헌신했죠.
넬리가 1912년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을 통해 이 저택은 프랑스 학술원(Institut de France)의 소유가 되어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었습니다. 유언장에서 그는 컬렉션이 가능한 한 많은 대중에게 공개되고 많은 방문객에게 전시되기를 바란다고 적었죠. 박물관 조건과 각 작품의 정확한 위치를 유언장에 명시하기까지 했습니다. 1913년 박물관은 대통령이 참석해 성대하게 개관했습니다. 오늘까지도 이 미술관은 소장품 외에도 특별전으로 명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응접실, 뮤직룸, 도서관, 흡연실 등 귀족 저택의 구조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고, 컬렉션의 화려함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프랑수와 부셰가 있는 픽쳐 갤러리, 자크 루이 다비드의 초상화가 있는 응접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가 걸린 스터디룸 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에는 폭만 7미터가 넘는 거대한 지암바티스타 티에폴로(Giambattista Tiepolo)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마지막 위대한 화가가 프랑스 역사의 한 에피소드를 박제한 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헨리 3세가 베니스에 도착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죠. 앙드레가 이 프레스코화를 구매한 후 베니스에서 파리로 운송되는 작업은 매우 복잡해서 앙드레가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벽화를 제거하고 운송하고 다시 설치하는데만 8개월이 걸렸습니다.
미술관의 이탈리아 컬렉션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파울로 우첼로의 <성 조지와 드래곤>(1430-35)입니다. 이 나무 그림은 왕의 딸을 삼키려는 용과 창으로 맞서는 성 조지를 그렸죠. 동양에서 유래한 이 주제는 이교도에 의해 억압받는 교회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자크마르는 피렌체 궁전에서 골동품 상인의 소유인 이 그림을 처음 만났지만 작품의 국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1899년 런던 경매까지 기다린 끝에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컬렉션의 정점은 피렌체 갤러리입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Virgin and Child>(1470)이 있는 곳이죠. 처음에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그림이라 믿고 구입을 했었습니다. 이후 보티첼리의 초기 경력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한 후에야 화가의 정체가 밝혀진 작품입니다. 개인 컬렉션으로 출발한 소규모 미술관에 보티첼리가 소장된 곳은 처음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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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olo Uccello <Saint George and the dragon>, 1430-35 ©Musée Jacquemart-Andr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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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ro Botticelli <Virgin and Child>, 1470 ©Musée Jacquemart-André |
Jean-Honoré Fragonard <Head of an old man>, 1765 ©Musée Jacquemart-Andr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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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여성 미술은 그녀로부터 시작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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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misia Gentileschi <Portait as a Lute Player>, 1614-1615 ©Musée Jacquemart-Andr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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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avaggio <The Crowning with Thorns>, 1602-1603 ©Musée Jacquemart-Andr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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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zio Gentileschi <The Crowning with Thorns>, 1613-1615 ©Musée Jacquemart-Andr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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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에 그린 첫 작품. Artemisia Gentileschi <Susanna and the elders>, 1610, ©Musée Jacquemart-André |
클레오파트라를 그린 그림 4점이 한 방에 전시되어 있다. ©Musée Jacquemart-Andr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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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6)를 위한 특별전의 제목은 <예술의 여주인공(Heroine of Art)>(3월 19일~8월 3일)이었습니다. 작년 런던에 도착해 첫 주에 관람한 전시가 테이트 브리튼의 영국의 여성 화가 특별전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전시에서도 계보의 첫 화가로 젠틸레스키를 만났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귀국을 앞두고 파리에서 이 화가의 온전한 회고전을 만나게 된 겁니다.
이번에 전시된 40점의 작품 중에는 자주 공개되지 않는 희귀한 작품도 여러점 있었습니다. 카라바조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카라바지스티'였던 그녀의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젠틸레스키는 그야말로 21세기의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여성 미술의 대표주자입니다. 2020년에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되며 큰 조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드라마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극적이었죠. 1593년 로마에서 태어난 그녀는 카라바조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와 함께 훈련받았습니다. 신동이었던 그녀가 탁월한 재능으로 17세에 날짜와 자신의 서명을 처음 적은 <수잔나와 노인들>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삶에 가장 결정적 사건은 1611년, 17세에 스승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한 일입니다. 재판이 이어졌고 타시는 추방형을 선고받았지만 교황의 보호를 받는 그에게 선고는 집행되지 않았죠. 재판 과정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증언을 증명하기 위해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7개월에 걸친 재판기록에는 그녀가 얼마나 "사실이다, 사실이다"라고 간절하게 외쳤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그녀는 중매결혼을 강요당합니다. 여성으로서의 명예를 저버렸다며 가족에게도 외면당한 겁니다. 평범한 화가 피에르안토니오 슈티아테시와의 결혼으로 로마에서 탈출해 피렌체로 이사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삶은 만개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메디치 가문과 같은 유럽의 주요 왕실 및 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죠. 실력과 명성, 인맥을 모두 얻게 됩니다. 이후에는 유럽을 유랑하며 베니스, 나폴리, 런던에서 성공한 화가로 만년을 보내게 되죠. 영국 왕실에도 초청되어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초상화를 남긴 덕분에 내셔널 갤러리가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게 됐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인생은 모든 면에서 선구적이었습니다. 20세기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성공한 여성 화가였습니다. 우선 아카데미아 델레 아르티 델 디세뇨(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 드로잉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죠. 일생에 걸쳐 후원자의 지원을 받고 그림으로 생계를 꾸리고 독립할 수 있었던 여성은 당시에는 그녀 외에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경과 문학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특히 여성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밧세바, 클레오파트라, 다나에, 에스더, 야엘, 루크레티아, 막달라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강인한 여성들의 초상화를 쉼없이 그렸습니다.
그림 속 여성들은 모두 영웅이었죠. 그녀들은 유혹의 힘을 사용해 남성들을 굴복시킵니다. 역설적으로 여성이 그린 여성 누드는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기에, 예술 애호가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생전의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망각된 화가가 됐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인 오라치오의 서정적이고 우아한 화풍과는 대조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에는 사랑과 분노와 질투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투영됐고, 폭발적인 힘을 역동적인 자세로 묘사합니다.
초상화를 주로 그렸던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는 카라바조입니다. 카라바조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스케치없이 실제 모델에서 직접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표작인 <다나에>와 <다윗과 골리앗> 등의 작품에선 강렬한 빛의 대비를 포현했습니다. 유명한 <류트 연주자로 그린 자화상>은 내셔널 갤러리의 카라바조의 옆에 걸려 있습니다. 복제품처럼 닮은 또 하나의 자화상을 이번 전시에서도 만났습니다.
전복적인 표현법은 때로는 카라바조를 능가하기도 합니다. 두 화가가 공통으로 그린 대표작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입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그림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했죠. 타시의 목을 자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겁니다. 덕분에 이 대표작은 불의에 당당히 맞서는 여성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전시장은 인위적으로 어두운 조명이 세팅되어 있어서 조명 아래의 그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남성의 목을 자르고, 머리에 망치로 못을 박고, 클레오파트라가 되어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들은 정말 강인해보였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 여전사들이 그림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아르테미시아는 정말로 시대를 앞서간 예언자였습니다.
이른 입장 시간에도 줄을 서서 들어갈 만큼 이 전시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관광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다소 연로한) 파리 시민만 가득한 전시를 본 것도 처음있는 일이어서,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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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misia Gentileschi <Judith and Her Maidservant>, 1615 ©Musée Jacquemart-André |
Artemisia Gentileschi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2–14 ©Musée Jacquemart-Andr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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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 이 놀라운 90세 현역 화가를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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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꼭대기층에 오르면 라데팡스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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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에서 그린 풍경화들을 전시한 방. 가장 감동적인 방이었다. ©김슬기 |
오페라 무대 미술을 몰입형 미디어 아트로 상영 중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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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슈퍼 스타의 인기는 남달랐습니다. 아트바젤 파리 위크에 찾았을 때조차도 쾌적하게 전시를 볼 수 있었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21세기 가장 유명한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회고전 <David Hockney 25>(4월 9일~8월 31일)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1955년부터 2025년까지 작가의 무려 70년의 예술 세계를 모두 보여주는 야심만만한 전시였습니다. 유화와 아크릴 페인팅, 잉크, 연필, 목탄 드로잉, 디지털 아트(iPhone, iPad, 사진 드로잉 등), 몰입형 미디어 아트까지 작품수만 400여점. 거대한 미술관의 모든 방 11개를 빠짐없이 사용했고, 이렇게 큰 호크니의 개인전은 앞으로 열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가장 비싼 그림인 <예술가의 초상>, <더 큰 첨벙> 같은 대표작부터 초상화 시리즈, 캘리포니아에서 그린 풍경, 와터에서 그린 풍경화 등을 빠짐없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뒤 '색채의 혁명기'를 통과한 그의 화려한 색채의 초대형 풍경화들 앞에서는 늘 관람객들의 찬사가 터져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그앞에서도 심드렁했습니다.
사실 호크니는 아트페어는 물론이고 세계의 그 어쩐 현대 미술관을 가도 만날 수 있는 '흔한' 작가가 아니었던가요. 이 작가의 작품에 큰 흥미가 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생전에 부귀영화를 모두 누리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공장처럼 작업을 찍어낸 화가를 좋아했던 적이 없거든요. 떠오르는 인물들이 몇몇 있으시죠?
그런데 이번 전시의 후반부를 만나면서 저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신작들에 호기심을 처음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그가 노르망디에 정착해 역병과 싸우며 고립되어 그린 봄꽃과 자연을 그린 그림을 실컷 만날 수 있었거든요. 무력감과 권태와 공포에 맞서는 방법으로 그는 쉬지 않고 노동을 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90세의 현역 화가에게 저는 인생의 진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2024년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뒤에도 쉬지 않고 스케치를 이어갔습니다. 그가 그린 영국 시골의 풍경들은, 런던에서 1년을 살면서 '영국병'이 걸린 저에게는 무척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이 전시의 10번 방에서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가 상영됩니다. 마술피리, 나비부인 같은 그의 오페라 무대 작업 상하좌우의 4면의 스크린에서 마치 4D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상영하는데, 어른들도 아이처럼 빈백에 누워서 푹 빠져 즐기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현대 미술이 테마파크와 경쟁을 해야하는 시대라면, 이 정도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예술가야말로 살아남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지막 전시실에 걸린 90세에 그린 자화상에서도 그는 여전히 유머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배운 게 많은 전시였습니다. 이번 회고전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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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현대미술관 퐁피두 센터는 기나긴 작별 인사를 하는 중입니다.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해 1977년 개관한 이 공간은 파리의 렌드마크가 됐죠. 50년을 버티며 낡아 버린 이 공간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에 들갔습니다. 올 상반기부터 차례로 공간을 폐쇄하며 전시를 줄여가고 있습니다. 공사 기간은 5년으로 2030년 재개관합니다.
상설 전시장이 문을 닫고, 제법 썰렁해진 퐁피두 센터는 정말 낯설더군요. 수잔 발라동(1865~1938, 1월 15일~5월 26일)은 전시 공간에서 여는 '마지막 전시'였습니다. (공식적인 마지막 전시는 도서관을 공간으로 사용해 현재 열리고 있는 볼프강 틸먼스의 사진전입니다.) 200점의 작가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들은 물론이고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1865년에 태어난 수잔 발라돈의 인생은 평범한 예술가들과 꽤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학교에서 미술을 배우지 않았고 15세부터 서커스 곡예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모델로 화가들과 처음 교류했습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테오필 알렉상드르 슈타인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등의 뮤즈 역할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녀의 예술가 친구들은 수잔 발라돈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했죠.
발라동은 혁명적인 근대 여명기, 파리 예술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친구들과 동료 예술가들, 가족과 남편의 초상도 정말 많이 남겼습니다. 노동 계급 출신으로 다양한 직업을 가졌고, 신분을 넘나들며 친구들과 어울렸던 그의 그림에서는 19세기 파리가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발라동은 여러차례 전통적인 여성상을 벗어난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리곤 했습니다. 담배를 물고 소파에 누운 발라동의 자화상이 유명하죠. 저는 고양이와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발라동과 같은 여성 미술가를 재평가하는 것은 이 시대의 사명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직 갈 길은 멀어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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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랑주리 미술관 <Out of focus>
- 8월 18일까지
모네의 <수련>을 보기 위해 가는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에서는 <Out of focus>라는 기획전을 열고 있었습니다. 흐릿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화법은 모네의 특징입니다. 동시대 미술에서 모네의 유산을 따르는 수십명의 회화를 전시합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흐릿하게 그린 꽃 한송이는 목을 꺾은 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삶의 덧없음을 표현한 바니타스 정물화가 눈에 밟혔습니다. |
- 페로탕 파리 <박가희>
- 4월 26일~5월 24일
마레 지구에 빽빽하게 밀집한 갤러리들도 부지런히 들렀습니다. 한국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던 뉴욕에서 활동하는 박가희 작가가 페로탕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었습니다. 파스텔톤의 과장된 여성의 신체와 동물들과 칼, 음식, 식물과 같은 이질적인 존재들이 그림 속에서 뒤엉켜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처럼 초현실적인 공간을 그림 속에 만들어내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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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는 루브르 뮤지엄을 만나봅니다.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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