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갑자기 한량이 된 '어쩌다보니 런더너' 김슬기입니다.
저는 올 여름부터 1년간 런던에서 살게 됐습니다. 런던하면 뭐가 떠오르시는지? 런던은 미술관의 도시입니다. '집돌이'에 사람만나는 걸 귀찮아하는 저도 이 도시에서는 혼자서 잘 놀고 있습니다.
이참에 저는 1년 동안 온 유럽의 미술관을 도장깨기하듯 돌아볼 작정입니다. 미술관 하나를 보기 위해, 해외로 훌쩍 떠나는 여행. 그리고 아주 사적인 미술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를 해볼 생각입니다.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첫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매주 수요일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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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런던에 유명한 미술관이 뭐가 있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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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런던의 여름 날씨는 춥습니다. 36도의 서울을 떠나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니 여긴 12도. 덜덜 떨면서 첫주를 보냈습니다. 물론 미세먼지 하나 없이 화창한 날씨에 즐겁게 외출을 해도, 하루가 머다하고 비바람이 스쳐지나가더군요.
런던은 세계 최고의 미술 도시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어도 내셔널갤러리와 대영박물관 정도는 찍고 갈 겁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이집트에서 공수해온 고대 유적을 공짜로 볼 수 있는데 놓칠 수 없죠.
영국의 미술관은 공공미술관의 정책 덕분에 대부분 무료 입장이 가능합니다. 무려 16년전에 공짜 티켓 정책을 취재하러 런던에 직딩이 되고 첫 출장을 온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청소년과 학생들에게 미술 소양을 심어주고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라도 정책 담당자가 설명해준 적이 있습니다.
대영박물관이 입장객수 세계 3위의 미술관*이 됐으니, 이 도시의 미술관 박물관은 말그대로 관광객을 빨아들이는 자석이 됐다고 볼 수 있겠죠.
*1위 루브르 박물관(약886만 명), 2위 바티칸 박물관(약 676만 명), 3위 영국박물관(약 582만명), 4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약 536만 명), 5위 테이트 모던(약 474만 명) (아트뉴스페이퍼 2023년 기준)
미술을 조금 더 좋아한다면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브리튼이라는 '테이튼 남매'도 알고 있겠지요. 런던에는 이런 대형 미술관 외에도 보석같은 작은 미술관이 많습니다. 코톨드 갤러리와 월리스 컬렉션이 대표적입니다. 도착 첫 주, 주요 미술관을 모두휘리릭 돌고 저는 작은 미술관 하나에 꽂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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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월러스 컬렉션 특별전 '로코코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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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부촌, 메릴본에 위치한 월리스 컬렉션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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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스 컬렉션(The Wallace Collection)은 부촌인 메릴본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런던의 아트 디스트릭트인 메이페어와도 매우 가깝습니다.
한눈에 봐도 대저택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1897년 레이디 월리스(Lady Wallace)가 국가에 기부해 국립 미술관이 됐습니다. 허트포드 후작과 리처드 월리스 경에 의해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완성한 이 컬렉션은 영국에서 공공에 기부된 최대 규모의 미술품 컬렉션 중 하나라고 하는데요. 무엇보다 연간 수백만명이 방문하는 대형 미술관과 달리 한적한 분위기가 매력적입니다.
컬렉션은 회화와 조각, 가구 외에도 영국 귀족들의 상징인 총, 칼, 활 등 무기와 갑옷 컬렉션도 꽤 많은 규모를 차지합니다. 회화 작품은 어마어마한 대작보다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은데요. 그럼에도 루벤스,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등 거장들의 작품이 고루 있고 베니스를 그린 풍경화도 많습니다. 19세기 찐부자들이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는 셈이죠.
이 곳의 대표작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그네(The Swing)'입니다. 2021년 여름 복원작업을 마치고 100여년만에 반짝이고 화려한 색상을 되찾은 이 그림 하나를 보기 위해 이 미술관을 찾는 이들도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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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관에서는 지금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플로라 유크노비치&프랑수와 부셰: 로코코의 언어>라는 2인전입니다. 프랑수와 부셰(1703-1770)는 18세기 프랑스는 대표하는 로코코 화가입니다. 전원으로의 소풍, 양을 치는 목동 등 목가적(Pastoral) 주제를 주로 그린 당대 인기 화가였습니다.
1990년생의 젊은 작가, 플로라 유크노비치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최애 작가'입니다. 2022년 미술경매에서 이 무명작가는 일약 2백만달러 작가가 되면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고전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자기만의 세계관이 확고한 작가라는 점이 특별하죠. 영국 노리치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는 유크노비치는 흔히 '로코코의 부활'을 꾀하는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여기 2층 웅장한 계단에 금빛 액자 속에 꼭대기에 부셰의 그림이 여러 점 걸려있습니다. 로코코는 1730년대 프랑스와 다른 곳에서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한 장식적이고 활기찬 스타일의 장르입니다. 하지만 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이런 부르주아 예술의 설 곳은 사라졌고, 로코코는 한 때의 유행으로 지나가버렸습니다. 유크노비치는 티에폴로, 프라고나르, 부셰의 로코코 그림을 다시 그리곤 하는데, 당대에 경박하고 퇴폐적이라 비판 받았던 그림을 선택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맞은편에 유크노비치의 대작 2점이 걸려있습니다. 솜사탕 같이 몽글몽글한 도상들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고, 화려한 색채가 캔버스를 파스텔톤으로 물들입니다.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반추상 회화로 분류되는 그의 그림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부셰의 그림이 겹쳐서 보이듯 아른거립니다. 목가적인 부셰의 그림과 달리 유크노비치의 '순수한 상상의 세계'에서 구름 위를 날고 있는 큰 동물들이 보입니다. 소나 돼지일 수도 있습니다. 21세기의 작가는 전복적이고 유쾌한 침입자일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전시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코코의 언어'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컨텍스트가 내 그림 속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실험할 수 있어서였어요. 파스토랄이란 좋은 아이디어지만, 이미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죠. 일종의 초현실적인, 판타지 랜드를 표현해볼 기회였다는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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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와 부셰 'A Summer Pastoral' ⓒThe Wallace Collection |
플로라 유크노비치 'A world of pure imagination' ⓒVictoria Mi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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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의 만남은 과거의 로코코가 오늘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이 고풍스러운 미술관에서 귀족들의 옛 생활상을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선한 시도를 했다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유크노비치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될 겁니다. 아트바젤과 같은 초대형 아트페어에서 오픈런이 벌어지는 스타 작가가 됐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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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개의 미술관과 갤러리를 둘러봤는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왕립 미술원(RCA)에서 만난 '불타는 6월(Flaming June)'(전시는 2월 17일~2025년 1월 12일)입니다. 왕립 아카데미 회장을 지낸 프레데릭 레이튼 남작의 1895년작으로 죽기 1년전에 완성된 대표작입니다. 홍조로 물든 얼굴로 낮잠에 빠진 오렌지색 드레스를 입 여인이 매혹적입니다. 1960년대 경매에 출품된 뒤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이 소유하게 되어, 모처럼 영국에서 이 그림이 전시되면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잠이라는 소재는 빅토리아 시대에 자주 그려진 소재였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을 그린듯 보이지만, 이 그림에는 모델이 있습니다. 독심이었던 레이튼이 딸처럼 아꼈던 도로시 딘입니다. 아리송한 제목 '불타는 6월'은 여름을 의인화해 그린 그림이 아닐까하는 해석을 빚어어냅니다. 오른쪽에 핀 꽃 협죽도는 6월에 만개한다고 하죠. 아름다운 모델이 잠에 빠진 여름, 레이튼은 도로시 딘을 보고 문득 영감이 떠올라 이 그림을 그린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작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습작에서 시작한 이 그림은 오늘까지도 그의 가장 인기있는 그림이 됐습니다. 이번 전시는 이 그림의 스케치를 비롯한 레이튼의 여러 작품과 함께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미켈란젤로의 부조 조각을 마주 보게 설치했습니다. '불타는 6월'은 미켈란젤로 작품인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무덤 조각과도 구도가 유사합니다.
불타는 6월은 벌써 까마득한 계절이 됐습니다. 런던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8월말이 되니 여름 전시들은 대거 막을 내렸고, 많은 갤러리들은 휴가를 떠났습니다. 10월이면 프리즈 위크가 돌아오기에 일찌감치 9월 전시를 여는 미술관과 갤러리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휴가로 런던에 오기 좋은 달은 역시 7월과 10월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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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런던 최고 인기 전시라면 테일러 스위프트 <Song Trail>(9월 8일까지)이 열리는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일지 모르겠다. 최애 가수의 굿즈 티셔츠를 입은 소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 전시라기엔 좀 애매한데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와 공연에 등장한 의상을 점점이 미술관 곳곳에 설치해 보물찾기를 하듯 만날 수 있도록 구성한 이벤트에 가깝다. 정말, 테일러 스위프트의 시대다. |
런던에 갤러리 2곳을 운영하는 가고시안의 두 전시 중 오스카 무리요(8월말까지 테이트 모던 터빈홀 전시)의 개인전은 막 막을 내렸다. 아직 온고잉인 전시는 데비스트리트에서 9월 28일까지 열리는 로 에스리지 (Roe Ethridge)의 사진전 <Happy Birthday Louise Parker II>. 정물화, 인물화, 패션 사진 등을 병행하고 명품과 콜라보에도 적극적인 작가인지라, 상업사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캔디와 명품백을 함게 찍은 정물처럼, 뭔가를 숨겨놓긴 한거 같은데 마냥 예쁘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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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편지는 가볍게 손만 풀어봤습니다. 다음주는 국립초상화미술관과 테이트 브리튼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씨유 넥스트 위크!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좋았어요! 🤗ㅣ 음, 잘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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