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9월입니다. 런던은 이제 완연한 가을 날씨에 접어 들었습니다. 미술관들은 여름 전시를 하나둘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주에는 막이 내리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만난 몇몇 특별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과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린 두 전시를 다녀왔습니다.
2회 (2024.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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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헨리 8세의 6명의 부인을 모르면 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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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캐서린, 앤 볼린, 제인 시모어, 클레브스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왼쪽부터 차례대로)의 초상화를 일본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가 사진으로 촬영했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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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좀 해보겠습니다. 역사학도가 아니라도 영문학을 조금만 공부해 본 적이 있어도 피할 수 없는 지뢰밭과 같은 시대가 있습니다. 영국 학생들에게는 지긋지긋할만큼 달달 외야 하는 역사 문제의 단골이자, 예술가들조차 사골국처럼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 시대가 있습니다. 바로 헨리 7세부터 시작된 튜더 왕조(1485~1603)입니다.
한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영제국의 통치자는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세계사 시간에 밑줄을 그어가며 배웠었죠. 영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이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시작점을 만든 시대였죠. 튜더 왕조는 엘리자베스 1세를 배출한 왕가입니다.
관광객보다는 영국인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는 미술관이 국립 초상화 미술관입니다. 내셔널 갤러리와 붙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좋지만, 관광객들에겐 "아니 내가 영국 사람들 초상화를 보러 꼭 가야해?" 싶은 곳 중 하나죠. 유명한 작품으로는 교과서에서 봤던 셰익스피어,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등이 있습니다. 물론 영국 역사를 잘 모른다면 지겨울 수 있지요.
9월 8일까지 여기서는 <Six Lives : The Stories of Henry VIII’s Queens>가 열리는 중입니다. 영국사 최고의 문제아로 결혼을 6번 한 헨리 8세과 그의 여섯 부인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역사화, 드로잉, 사진, 의상, 영화 등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입니다.
포스터에 쓰인 히로시 스기모토의 사진이 입구부터 관람객을 맞는데요. 정말 인상적인 사진입니다.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을 흑백으로 촬영하자, 극사실주의적 화풍과 달리 오늘날 인물을 찍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4K 같은 초고화질 영상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폴라로이드 같은 필름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더 즉물적으로 만나는 것과 비슷한 효과랄까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한스 홀바인은 튜더 왕조의 초상화를 도맡아 그렸습니다.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모델을 재현하는 것은 꽤나 불경스러운 일이었을겁니다. 직장 상사의 질문에도 솔직히 답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니, 홀바인의 일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었을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예술을 통해 불운했던 여섯 부인의 삶은 흔적이 남았습니다. 영국 학생들은
아라곤의 캐서린, 앤 볼린, 제인 시모어, 클레브스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의 비극적 삶을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사망을 운율을 붙여 외운다고도 합니다.
이들의 극적인 드라마는 이후 몇 세기 동안의 역사와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끝없이 다뤄졌습니다. 21세기 영국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을 비롯해 드라마 <튜더스>, 영화 <천일의 스캔들> 등 유명한 작품이 넘쳐납니다.
이들의 삶을 이 전시는 미술사적 연구를 통해 한꺼풀 더 들춰내고,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 인물과 예술가들의 교감을 통해서 말이죠. 폭군 헨리 8세가 아닌 여섯 여성이 주인공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복권일 겁니다. 게다가 이 미술관이 재개관한 이후 열린 첫 초상화 전시여서 영국인들의 더욱 큰 환호를 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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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테이트 브리튼의 특별전 '영국의 여성 화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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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열린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브리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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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의자들이 귀여웠다. ⓒ김슬기 |
아마도 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 ⓒ테이트 브리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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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도심의 서쪽 강변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은 저의 '최애' 중 한 곳입니다. 내셔널갤러리-테이트 브리튼-테이트 모던은 조금씩 시대를 달리하는 컬렉션을 자랑하는데요.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500여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테이트 브리튼의 주요 컬렉션은 라파엘 전파와 JMW 터너, 데이비드 호크니입니다. 무엇보다 존 에버릿 밀레이의 처연한 <오필리아>는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이미지일 겁니다. 그야말로 영국의 국민화가들이 총집합이죠.
9월 5일 막내리는 특별전 <NOW YOU SEE US : WOMEN ARTISTS IN BRITAIN 1520–1920>을 가까스로 봤습니다. 프롤로그와 접점이 있지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영국의 미술사에서 그늘에 가려있지만 뚜렷한 족적을 남긴 20여명의 여성 화가를 이 전시는 소개합니다. 400년에 걸친 이 여성들의 예술은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한 힘겨운 여정을 따라갑니다.
수잔나 호렌부트(1503~1554)와 레비나 틸린크(1510~1576)는 영국에서 예술가로 이름을 올린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17세기 런던에 도착한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가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찰스 1세의 초청으로 런던에 와서 궁정에서 주문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당대에 이미 부와 명성, 자신의 미술학교까지 얻었던 그의 명성은 후대의 여성 화가들에게는 빛과 그늘을 모두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화상은 이번 전시를 시작하는 탁월한 텍스트입니다.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1860년까지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라 허포드는 첫 입학생이었는데, 작품을 제출 받을 때는 이니셜을 사용해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웬 존의 <자화상>은 그의 데뷔작입니다. 그가 데뷔 전시를 한 뉴잉글리시아트클럽(NEAC)는 보수적인 왕립 아카데미에 대항해 설립된 진보적인 예술가 단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0년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여성 작가는 16명에 불과했습니다. 남성은 75명이 속해있었음에도 말이죠. 자화상을 그린 것은 자신의 성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위대한 여성 화가들은 다채로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150여 편의 작품은 아마추어로 여겨지면 남성 예술가의 그늘에 가려 있던 그들의 고정관념을 하나씩 해체합니다. 그들은 역사 작품, 전투 장면, 누드 등 남성 예술가들의 소재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대담하게 그렸습니다.
메리 빌, 안젤리카 카우프만, 엘리자베스 버틀러, 로라 나이트, 바네사 벨 등의 예술가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여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습니다. 이 전시는 예술계에서 여성으로서 그들이 장애물을 극복한 방법을 조명합니다. 그들이 예술가로서 상업적 경력을 쌓고, 전시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 하나하나 의미있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마치 선언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입니다, 라는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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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불일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20여명의 작가 중에는 바네사 벨(1879~1961)이 포함되었고, 그의 <벽난로 구석의 정물화>가 소개됩니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인 바네사 벨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모더니즘을 개척한 예술가, 작가, 철학자들로 구성된 전위적인 커뮤니티, 블룸스버리 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마침 코톨드 캘러리에서는 그들이 소장한 주요한 벨 컬렉션을 소개하는 첫 전시를 열고 있습니다 영국의 여성 화가에 관해 심화 학습을 하고 싶다면 이 곳도 둘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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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톨드 갤러리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인 Vanessa Bell <A Conversation> © Estate of Vanessa B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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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조플링의 <모던 신데렐라> ⓒ테이트 브리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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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브리튼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그림은 1875년작인 루이스 조플링의 <모던 신데렐라>였습니다. 순수한 공주로 그려지곤 하는 신데렐라를 조플링은 분홍색 드레스를 살짝 벗고, 어깨를 드러낸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왼쪽 신발을 잃어버린 모습에서 신데렐라임을 드러내죠.
조플링은 19세기 런던에 '조플링 부인의 예술 학교'라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예술가 학교를 설립한 화가입니다. 당대에 명성을 얻기 위해 많은 차별을 극복하며 그는 자신의 자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림 속에는 섬세한 상징들이 숨어있습니다. 호화로운 분홍색 드레스, 장식용 꽃병, 벽에 걸린 흉상, 화려한 가구가 어우러져 그림의 주인공이 상류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빅토리아 시대 미술에서 거울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피사체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드러내는 경우에 많이 쓰였습니다. 거울 속에는 자정을 알리는 시계가 숨어 있고, 화가의 이젤이 보입니다.
초상화를 주로 그렸던 조플링은 자신을 드러낸 적이 드물었습니다. 따라서 미술사가들은 이 이젤을 통해 이 그림은 단순한 신데렐라의 그림이 아닌, 자화상이 아닐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주인공이 된 여성 화가로는 루이스 조플링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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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ckney and Piero: A Longer Look
- 내셔널 갤러리, 10월 27일까지
데이비드 호크니는 젊은 시절, 내셔널 갤러리와 중요한 인연이 있었다. 처음 미술관을 찾은 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토의 세례>에 큰 영감을 받았다. 그는 1981년 객원 큐레이터로 전시에 참여하며 자신의 그림에 이 거장의 그림을 새겨넣었다. 두 작품을 모두 볼 수 있는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내셔널 갤러리 팝업 전시로 선보여지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미술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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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최근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다음주에는 에딘버러 이야기부터 들려드립니다. 우리 건강히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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