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벨라스케스의 정수는 <시녀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라크네 신화를 그린 <실 잣는 여인들, 혹은 아라크네 우화(Las Hilanderas)>를 오늘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무척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요.
심지어 예일대의 벨라스케스 학자 조나단 브라운은 <시녀들>과 이 작품을 벨라스케스의 "두 개의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수 없지만 그림 속 구성이 그의 작업 중 가장 복잡한 작품인 점을 감안하면, <시녀들> 이후의 작업이라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꽤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저는 그림 속 숨겨진 이야기에 매료됐습니다. 3세기 넘게 이 그림은 태피스트리 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묘사한 것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 이유는 1734년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 화재로 인해 손상되었다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림 속 아치가 그려진 상단과 좌우에 띠가 추가되며 태피스트리 속 그림을 더 멀리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덧붙인 부분을 가린채 원본대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1948년 디에고 앙굴라는 이 그림이 아라크네 우화임을 밝혀냅니다. 앙굴라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프라도 미술관장을 지낸 저명한 미술사학자입니다. 이 그림은 세 겹의 레이어를 고루 밝은 빛으로 비추고 있습니다. 마치 오손 웰즈의 영화적 기술인 '딥 포커스(Deep Focus)' 같은 실험처럼 보입니다.
전면부의 여인들은 누추한 복장에 맨발로 실을 잣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그림과 달리 그림의 배경이라 할 뒷부분이 밝게 빛이 나고 있죠. 이 곳에는 우아한 귀부인들이 태피스트리를 감상하고 있습니다. 태피스트리에 수놓은 그림이 바로 3세기만에 밝혀진 그리스 신화의 장면입니다.
이 신화 속 장면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아라크네와 아테네의 이야기입니다. 백발의 노파로 변신해 나타난 아테네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라크네는 오만하게 공예의 여신과 태피스트리를 짜는 대결에 나섰죠.
아테네는 직물 속에 포세이돈과 대결에서 승리한 자신과 신과 대결하다 저주 받는 인간들을 수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유로파를 겁탈하는 제우스를 수놓았습니다. 대결에서 진 뒤, 질투심에 눈이 먼 아테네는 자신의 아버지를 능욕한 아라크네를 저주합니다. 거미로 만들어 눈이 먼채 평생 실을 뽑아내도록 만듭니다.
미술사에서는 아라크네를 벨라스케스의 분신처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당대 최고의 화가는 감히 신과 대결하는 오만한 인간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태피스트리 속에는 투구를 쓴 여신 아테네와 아라크네가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 태피스트리 속에서 아라크네가 짠 태피스트리(그림 속 그림)는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티치아노가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린 <유로파의 강간>(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이 새겨져 있죠. 루벤스도 1628~1629년 마드리드에 머물며 이를 모방해 그린 명작입니다.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에서 만난 루벤스의 많은 그림을 모방하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로 이 태피스트리는 루벤스의 그림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의 원본 그림을 루벤스가 베낀 그림을, 다시 태피스트리로 재현하는 3중의 모방을 한 겁니다. 대결을 하는 아라크네의 태피스트리는 귀부인들이 마치 상점에서 가구를 고르듯 전시되고 있고, 무대에서는 또다른 아라크네와 아테네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죠.
재미있게도 이 지점에서 20세기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을 품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기존의 예술을 뒤틀거나, 인용하고 재해석하는 미학인 패러디(Parody)와 패스티쉬(Pastiche)의 전형으로 보였거든요. 오늘날은 "명징하게 직조된" 이라는 수식어가 대표적인 예술을 상찬하는 표현이 된 시대가 아니던가요.
결국 이 그림은 거장이 그려낸 '예술론'입니다. 예술의 힘을 통해 재료(직조 과정)에서 형태(태피스트리)로 넘어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회화의 고귀함을 옹호하는 작품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신이 수놓은 예술과 공방의 태피스트리는 동등하게 고귀하고, 인간의 기술 또한 예술의 요소라는 주장을 내포한 셈이죠.
공교롭게도 태피스트리는 21세기 여성 미술의 가장 떠오르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태피스트리 공방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학대한 아버지를 증오하며, 그를 살해하는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든 여성 미술의 대모가 있습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입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대표작인 청동 거미 '마망'은 여성 미술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죠. 거미 여인이 된 아라크네에게서 루이스 부르주아의 이야기가 포개졌습니다.
아라크네는 제우스만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포세이돈, 크로노스 등을 모두 단죄합니다. 아라크네가 가부장제를 고발하는 강인하고 패기 넘치는 여성의 전형이라는 해석이 오늘날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유입니다. 현실의 폭력에 입은 틀어 막힌채, 실을 잣는 노동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은 모두 거미 여인의 후손, 즉 아라크네의 자식들입니다.
게다가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작품 중 온전히 여성만 등장하는 희귀한 작품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벨라스케스를 '여성 미술의 시조새'라고 해석해도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그림은 내용와 소재, 형식 모두에서 놀랍도록 동시대적입니다. 정교하고 복잡한 그림은 모호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이는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비밀이 3세기 만에 밝혀진 그림의 사연은 또 어떻구요. 21세기의 관람객조차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이보다 새로운 예술이 있을까요. 이 그림을 만난 것만으로, 마드리드 여행의 가치는 충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