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미술관에 '살인자, 도망자, 천재화가'를 만나러 왔습니다. 지난해, 카라바조의 새로운 그림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카라바조의 <에체 호모(Ecce Homo)>(1606-09)입니다. 미술관 입구부터 곳곳에는 잃어버린 카라바조(The Lost Caravaggio: the Ecce Homo Unveiled)라는 제목의 기획전 포스터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작년 5월부터 2월23일까지 소위 카라바조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 회화의 공간인 7번 방에 걸려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만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이 풍운아는 17세기 네덜란드와 프랑스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 방에는 다니엘 크레스피의 <채찍질(Flagellation)>(1625), 니콜라스 트루니에 <베드로의 부인>(1625), 마티아스 스톰의 <도마의 의심>(1641) 등이 함께 걸려 있습니다. 이 성경 속 이야기들은 카라바조가 그렸던 대표작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 자연주의 화가들은 카라바조보다 더 어두운 검은 색을 사용하고, 윤곽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붓질을 하고 있습니다.
<에체 호모>는 라틴어로 '이 남자를 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형에 앞서 예수를 유대 백성들 앞에 선보이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우유부단한 총독이 자신의 사형 선고가 아닌 백성들의 요구로 사형이 이뤄진다는 책임 회피를 하고 있죠.
사형 하루 전날 이뤄진 예수의 수난을 그린 도상은 가시관과, 갈대 조각, 보라색 가운이 특징입니다. 등장 인물은 왼쪽의 빌라도, 예수, 시민의 세 사람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의 연구팀은 카라바조의 전작과의 유사성, 그림 속 프레이밍, 인물들의 제스처와 색감, 빛의 강렬한 대조를 진위의 증거로 꼽았습니다.
이 미스터리한 작품은 1631년 나폴리에서 스페인 총독의 비서였던 후안 데 레스카노의 자산으로 처음 기록이 남아있고, 오래동안 왕립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어 한때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개인 소장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2021년 단돈 1,500 유로에 개인 소장가에 의해 경매에 출품될 뻔 했지만 프라도 미술관과 마술사가들이 검증과 복원을 거쳐 진품으로 인정되는 극적인 드라마를 썼습니다.
호모 에체는 고대 종교화가 줄기차게 반복해서 그려온 소재입니다. 이름난 미술관에 에체, 호모가 한 점도 없다면 뭔가 이상하다고 봐야합니다. 리스본에서 찾은 소박한 규모의 <고대 미술관>에서도 입구에 걸려 있는 작품이 작가 미상의 <에체 호모>였습니다.
이번 여행은 의심과 궁금증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카라바조의 60여점의 전작 중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을 시작으로 로마, 런던, 파리, 마드리드 등에서 30여점 이상을 본 것 같습니다. 카라바조는 인물에 집중되는 빛과 배경의 칠흙같은 어두움의 대비가 극적인 표현법을 씁니다. 그래서 실물을 만났을 때 가장 탁월한 차이점을 보여주는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암부 (暗部)조차도 섬세하게 그려져 그 속에서 빛과 그림자가 드러나는 표현이 카라바조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에체 호모>는 얼핏 보기에 암부의 표현이 단조로웠습니다. 예수의 얼굴은 무척 고전적이죠. 완벽한 조형성과 구도는 카라바조스럽지만, 이 작품에서는 한 눈에 화가의 특징이 드러나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물로 본 그림 앞에서 모니터와는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빌라도와 병사의 눈동자 안에는 반짝이는 인광이 보였습니다. 벌어진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죠. 자아가 분명한 인물의 표현은 카라바조의 특징이죠. 암부 속의 빛과 그림자는 없었지만, 그림 전체적으로는 은은하게 빛나는 명암이 보였습니다.
<에체 호모>는 살인죄로 나폴리로 도피 중이던 어려운 시기에 그려졌으며,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하는 도망자의 긴장감을 반영하고 있다고 미술관은 설명합니다. 그의 후기 작품이 초기에 비해 빠르고 간결한 스타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지만, 세부 표현에서 결코 정확성이 부족한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 <성 우르술라의 순교>를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했을 때, 그 작품 또한 기존의 카라바조와는 꽤 달리 보였습니다. 납처럼 창백한 우르술라의 피부와 함께 암부는 칠흙처럼 어둡게 그려졌습니다.
마치 늙은 자화상을 골리앗의 얼굴 대신 그린 것처럼, 희망을 잃고 더 어두운 그림을 그렸던 말년의 카라바조였다면 <에체 호모>와 같은 화법이 충분히 가능했을 겁니다. 제작 시기가 모호한 <에체 호모>가 그의 만년의 작품이라는 가정을 하고 이 그림을 본다면, 연구자들의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