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미술관의 도시' 베를린을 즐기는 방법 중 효율적인 방법은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나눠서 관람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시대별로 차례대로 미술관을 만나보려면 동선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오가야해서, 하루씩 문화포럼과 박물관섬을 찾아가는 것이 체력을 아끼는 방법입니다. 오늘은 동베를린부터 만나보겠습니다.
29회 (2025.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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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섬의 랜드마크인 베를린 돔과 함께 멀리 텔레비전 타워가 보인다. 고층 건물이 많지 않은 베를린에서는 텔레비전 타워로 방향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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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예술과 학습의 성지, 베를린 박물관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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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전처럼 높게 우뚝 솟아있는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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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개의 뮤지엄이 밀집한 박물관섬(Museumsinsel)은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예술 도시, 베를린의 랜드마크입니다. 시작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이때부터 궁정 컬렉션은 쿤스트카머(Kunstkammer)라는 이름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800년대 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기존의 궁정 컬렉션을 해체하고 공공 미술관 설립을 지지했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패배 이후, 이 개혁파 군주는 프로이센을 군사 국가에서 문화 국가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죠.
1841년 빌헬름 4세는 슈프레 섬의 알테스 박물관 북쪽의 모든 땅을 '예술과 학습의 성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선언하며 마침내 이 섬이 박물관섬으로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알테스 박물관, 보데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등이 차례로 탄생했습니다.
암흑의 시기도 거쳐야했습니다. 나치 정권의 문화 정책은 특히 국립미술관 등 현대 미술 컬렉션에 극적인 손실을 입혔죠. 1937년에는 수백 점의 회화, 드로잉, 판화가 '퇴행 예술'로 낙인찍힌 후 강제로 압수됐습니다. 외화 조달을 위해 명작들이 국외로 팔렸고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섬의 모든 건물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손상을 입기도 했죠.
창고에 보관되던 유물들은 붉은 군대의 점령이후 1945년에 몰수되어 소련으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1958년, 소련은 150만 점의 유물을 동독에 반환했지만 수백 점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러시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박물관섬을 예전의 영광으로 복원하는 과정은 2001년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 2006년 보데 박물관(Bode-Museum), 2009년 베를린 신 박물관(Neues Museum)의 보수 및 재개관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페르가몬박물관(Pergamonmuseum)의 보수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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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독일의 근대미술을 만나는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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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홀의 관람객. 가운데 작품은 <The Watzmann>, 1824–1825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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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최초로 인상주의 그림을 구입한 기록을 세운 작품. Edouard Manet <In the Conservatory>, 1878-79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독일 표현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 오이디푸스를 유혹하는 키르케를 그렸다. Franz von Stuck, <Tilla Durieux as Circe>, 1912-14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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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은 적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그리스 신전 같은 외관부터 인상적입니다. 10년에 걸쳐 건축된 이 미술관은 1876년 박물관섬의 세 번째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의 가장 광범위한 미술 컬렉션을 보유한 독일의 대표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박물관의 주요 컬렉션은 1861년 은행가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바게너가 프로이센 정부에 기부하면서 큰 토대가 구축했습니다. 이후 1896년 인상파 애호가인 휴고 폰 츄디(Hugo von Tschudi) 관장이 에두아르 마네의 <In the Conservatory>와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 전망>을 구입하면서 인상파 미술을 구입한 세계 최초의 미술관이라는 명성도 얻었죠.
약 1800점의 그림과 1500점의 조각을 소장한 이 곳은 인상파 컬렉션으로도 유명하지만 19세기 독일 근대 미술사를 교과서를 보듯 공부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돌프 폰 힐데브란트, 아놀드 뵈클린, 안젤름 포이어 바흐와 뮌헨 학파의 강렬한 표현력에는 감탄이 나옵니다. 독일에서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렸던 막스 리버만도 만날 수 있죠.
저에게는 10여년 전 첫 베를린 여행 당시 독일의 국민화가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와 아돌프 멘첼(Adolph Menzel, 1815~1905)을 처음 만나게 해준 좋은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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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1808-10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Caspar David Friedrich <Abbey among Oak Trees>, 1810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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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미술관이 소장한 Caspar David Friedrich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Hamburger Kunsthalle |
Sabine Lepsius <Self Portrait>, 1885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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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는 사후에는 잊혀졌지만 1970년대부터 재평가되며 터너, 들라크루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가 됐습니다. 저에게는 춥고 쓸쓸한 북구의 예술가만 그릴 수 있을 법한 황량한 폐허의 풍경으로 각인된 작가입니다.
10여점의 프리드리히 작품을 걸어 놓은 프리드리히의 홀은 겨울의 광야에서 홀로 선 수도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숭고함이라는 단어가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작가는 없을 겁니다.
발트해 연안의 작은 항구 도시인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의 어린 시절은 비극적인 사건이 많았습니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이어서 누이와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개인사는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무자비함,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은 그림 속에 표현됐습니다.
이 화가는 코펜하겐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드레스덴에 정착했습니다. 드레스덴 알베르티눔에서도 드레스덴 풍경화를 비롯한 대표작을 여러점 만났는데, 이 미술관이 작년에 선보인 기획전의 주제는 그가 예술 세계를 완성한 이 도시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은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종교적인 풍경화를 그립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밤하늘, 아침 안개, 앙상한 나무, 고딕 교회의 폐허 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의 주인공이 아닌 그저 뒷모습 혹은 실루엣만으로 묘사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의 그림 속 으스스하면서도 광활한 자연은 신성한 힘을 품은 신처럼 묘사되고, 이는 한없이 작은 인간의 존재감과 대비됩니다. 자연의 숭고함, 개인주의, 영적 성찰이 그의 작품을 읽는 키워드가 된 것은 이런 특징 때문입니다. 20세기에 이 화가가 부활한 것은 신이 사라져 가는 무신론의 시대의 역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구 국립미술관의 간판 작품이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Monk by the Sea)>(1808-10)입니다. 작년 이 거장의 탄생 250주년을 맞아 독일의 많은 미술관들이 프리드리히 전시를 열었습니다. 구 국립미술관의 기획전에 포함된 이 그림은 아쉽게도 1월부터 5월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순회 전시를 떠나서 이번 여행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작년의 전시를 놓친 탓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뒷모습 그림(Rückenfigur)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를 못 만난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고독을 형상화한 것 같은 작품입니다. 화가는 관람객이 마치 방랑자가 된 것처럼 자연의 경이로운 광대함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프리드리히의 자화상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안개 낀 풍경은 삶의 불확실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뚝 선 남자의 강인한 뒷모습은 민족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작가의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죠. 이 걸작은 수많은 오마주를 낳았고, 그림에 영감을 준 지역에 있는 말러베크(Malerweg, 화가의 길)라는 하이킹 코스를 탄생시키며 문화적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이 그런 점에서 이 미술관의 또 다른 간판 자화상인 사빈 렙시우스(1864~1942)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다음 시대를 산 이 여성 화가의 자화상은 남성 중심적이었던 19세기 독일 미술계에서 도발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품입니다. 당당한 표정과 화구를 든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한껏 드러내고 있죠.
사빈 렙시우스는 왕립 학술 음악원에 다녔지만, 여성을 위한 교육 기회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며 학교를 떠났다가 뒤늦게 붓을 잡은 화가입니다. 베를린 유대인 공동체의 동료들의 초상화를 평생에 걸쳐 그렸습니다. 렙시우스와 남편은 베를린에서 휴고 폰 호프만슈탈, 라이너 마리아 릴케, 카테 콜비츠와 같은 예술가 지식인이 찾는 살롱을 운영하기도 했죠. 자유분방하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았던 이 자화상도 프리드리히의 강인한 뒷모습만큼이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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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ph Menzel <The Iron Rolling Mill(Modern Cyclopes)>, 1872-75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Adolph Menzel <The Artist’s foot>, 1876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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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멘첼은 독일에 가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 국립미술관을 방문하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될겁니다. 구 국립미술관은 큰 홀과 몇 개의 방을 헌정했을 만큼 그의 존재감이 큽니다.
멘첼은 프리드리히에게 국민화가의 타이틀을 물려받은 사실주의의 대표화가입니다. 키가 약 137cm에 불과했던 이 작은 거인은 1830년대부터 1905년 사망까지 독일 역사의 굵직한 변화인 산업화, 정치적 격변을 목격하며 기록한 19세기의 눈이었습니다.
멘젤은 1843-49년 프란츠 쿠글러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200점의 삽화로 그리면서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가 됐습니다. 이후 괴테 시집 삽화를 그리기도 했던 그는 제국의 상류층과 공식 궁정 사회에 속해 있었지만 예술가의 모습이나, 서민들의 모습가지도 당대의 사회상을 그림으로 낱낱이 기록했죠.
멘첼이 1861-65년 그렸던 빌헬름 1세 왕의 대관식 그림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화가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작품은 엄청난 크기의 대작 <압연공장(Iron-Rolling Mil)>(1875)입니다. 현대의 키클롭스라는 부제의 키클롭스는 외눈박이 괴물입니다. 멘첼은 프로이센 국영 철로 공장에서 직접 관찰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쇳물이 녹아내리는 모습과 땀을 흘리며 쇠를 두들기는 대장장이의 모습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그는 산업화의 이면을 그림으로 그린 첫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초상화, 궁정화, 풍경화 등 다채로운 화풍을 보여주지만 작은 크기의 자신의 발을 그린 그림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당시 그는 71세였고, 현존하는 가장 인기 있는 독일 화가였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의 발을 묘사함으로써 예술가의 선택의 자유를 뽐내는 그림을 그렸던 겁니다.
1905년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질 만큼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빛과 공기를 표현하는데 탁월했던 이 국민화가는 인상주의적 접근 방식을 예견하는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독일 화가들은 멘첼의 후예들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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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 히틀러의 벙커가 미술관이 된 잠룽 보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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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대미술관, 잠룽 보로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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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가장 힙한 신상 미술관은 잠룽 보로스(Sammlung Boros)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행에 앞서 1~2주 정도는 미리 예약을 해야 겨우 티켓을 구할 수 있을만큼 인기가 많습니다.
각각 영어와 독일어로 30분 간격으로 최대 12명의 프라이빗 투어로만 관람이 진행됩니다. 5개층에 걸쳐 무려 80여개에 달하는 방은 미로처럼 동선이 복잡하고 내부에서는 길을 잃을수도 있어서 1시간 넘게 이어지는 도슨트의 안내를 따라서만 내부 관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942년에 지어진 잠룽 보로스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지어진 나치 벙커였습니다. 전쟁 당시에는 히틀러 군의 벙커로, 전쟁 이후에는 포로 수용소로 사용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콘크리트 벽의 두께만 약 2미터에 달하고 건물 외벽에는 작은 창문 사이마다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창고로도 사용되며 오랫동안 버려진 곳이었다가 1990년대 테크노 클럽으로도 사용됐는데 재미있는 비화가 있습니다. 각 방마다 촛불을 켜고 춤을 추다가 불이 꺼지면 다음방으로 이동을 했다고 합니다. 촛불은 밀폐된 방에 산소가 부족해 질식 위험이 있다는 신호였거든요.
그러다 2003년 현대미술 수집가 크리스찬 보로스가 구입했고 5년에 걸친 설계와 공사끝에 2008년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보로스 부부는 전 세계를 돌며 동시대 미술을 수집해 이 공간을 자신의 입맛대로 꾸며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1990년부터 수집한 700여 점의 컬렉션은 4년마다 새로운 전시로 큐레이션되는데, 지금은 4번째 전시가 열리고 있는 중입니다.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볼프강 틸만 등 블루칩 작가를 소유하고 초기에는 전시하기도 했지만, 현재 열리는 전시에서는 젊은 신진작가들의 작품으로만 채워져 있었습니다.
현대인의 소비문화를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안나 우덴베르크,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설치 미술작가 안네 임호프, 움직이는 조명 작업으로 눈길을 끈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 등의 신선한 작업이 많았습니다.
이 벙커는 수장고도 겸하고 있고 소장가 부부의 펜트하우스까지 꼭대기층에 있는 건물입니다. 폭탄이 터져도 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미술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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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nold Böcklin <The Isle of the Dead>, 1883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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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수 한가운데 사이프러스 나무가 솟아있는 미지의 바위섬이 있습니다. 망자를 싣고서 배는 섬을 향해 나아갑니다.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의 <죽음의 섬>(1883)은 그림 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뵈클린은 평생 죽음과 사투했던 화가입니다. 결혼 후 14명의 자녀 중 8명이 자신보다 앞서 죽음의 강을 건넜습니다. 1880년에서 1886년 사이에 뵈클린은 이 그림을 5가지 버전으로 그렸고,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는 모티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세 번째 버전이 구 국립미술관에 걸려있습니다. 스위스 바젤 미술관(첫 번째 버전)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두 번째 버전)에도 이 시리즈가 걸려있죠. 네 번째 버전은 소실됐고, 마지막 버전은 라이프치히에 있습니다.
당시 그림을 의뢰한 마리 베르나는 1880년 4월에 뵈클린의 피렌체 작업실을 방문해 이젤에서 반쯤 완성된 그림을 보았습니다. 미술품 수집가 알렉산더 귄터가 주문한 ‘죽음의 섬’ 첫 번째 버전이었죠.
그녀는 화가에게 무덤이 있는 바위섬 절벽으로 향하는 작은 배와 그 안에 흰 옷을 입고 있는 미망인의 모습과 관을 추가로 그려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이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몇 년 전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재혼을 앞두고 있던 그는 이 그림을 의뢰하며 작별인사를 건네고자 했던 겁니다.
세 번째 버전은 조금 더 바위산을 자세하고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저는 베를리너들이 사랑하는 이 버전이 가장 미스터리하면서도 매혹적인 것 같습니다. 죽음을 섬에 비유한 이 작품은 19~20세기 독일에서는 '게르만의 영혼'이라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집집마다 복제화가 걸렸있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히틀러조차 뵈클린을 좋아해서 미술관에 걸린 세번째 버전을 집무실에 걸어두었을 정도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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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프루스 마거스 베를린 <Lucy Dodd>
- 4월 5일까지
베를린에서 만난 가장 감각적인 갤러리는 스프루스 마거스였습니다. 루시 도드(Lucy Dodd)는 캔버스를 여려 형태로 잘라서 만든 비정형의 그림을 다채롭게 걸어놓고 있었습니다. '귀환: 북해의 작품들(The Return: Works from the North Sea)'이란 제목처럼 작가가 최근 뉴욕 북부에서 스코틀랜드 시골로 이사하면서 작업의 변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춤을 추는 것처럼 자유롭게 표현된 따스한 색채의 화풍은 바다 같기도 하고 은하수 같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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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편은 스크롤 압박이 심해지네요.
고작 1주일이 지났는데도 기억을 끄집어내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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