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저는 동유럽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빈-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을 돌면서 11박12일 동안 17개의 미술관을 찾아갔습니다. 동유럽의 날씨가 너무 추워서 미술관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으니, 의도하지 않은 강행군이 됐달까요.
문제는 여행 일정과 연재 일정이 마구 꼬이는 중이라는 겁니다. 일단은 종착지인 베를린의 이야기를 먼저 하고 다른 도시를 차례로 만나볼 계획입니다.
28회 (202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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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섬 제외) 최대 도시 베를린의 첫인상은 이런 느낌?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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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베를린 현대미술의 아이콘, 함부르거 반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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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매우 힙해지는 함부르거 반호프. 형광색 조명은 댄 플레빈의 작품이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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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정말 런던과 다른 도시입니다. 콘크리트 덩어리로 가득한 모습 때문에 한국인에게 익숙한 아파트! 아파트!의 도시 같다는 첫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개발한 덕분인지 큰 건물과 차가 질주 할 수 있는 넓은 도로, 정방형으로 주거지가 구획된 유럽의 보기 드문 대도시였습니다.
계획도시의 장점은 예술 지구를 조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베를린에는 유명한 뮤지엄 아일랜드가 있고, 베를린 필하모니아와 국립 회화관, 신국립 미술관, 공예 박물관 등이 밀집한 문화지구가 또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곳곳에 공장과 발전소 등을 개조한 문화공간도 즐비하고 미술관만 10개가 넘게 있습니다. 유럽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예술가의 도시'다운 모습입니다.
문화공간 밀집 지구 외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중앙역에 인접한 베를린의 국립현대미술관인 함부르거 반호프(Hamburger Bahnhof – Nationalgalerie der Gegenwart)입니다. 19세기의 독일 최초의 기차역 중 한 곳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곳이죠.
함부르거 반호프는 함부르크 사람을 뜻하는 함부르거와 기차역을 뜻하는 반호프의 합성어입니다. 이 곳은 베를린과 함부르크를 오가던 기차역으로 쓰인 곳이었죠. 후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원형은 건축가 프리드리히 노이하우스의 작품이었습니다.
이 기차역은 1884년 문을 닫았습니다. 교통-건축 박물관으로 잠시 쓰이다 전쟁 이후에는 폐허로 방치됐죠. 모더니즘 건축가 요제프 파울 클라이휴즈의 리모델링으로 공간이 크게 확장되면서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위치도 크기도 서울역 구역사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소박한 첫인상과 달리 내부로 들어가게되면 엄청난 공간의 규모에 압도당합니다. 약 10,000제곱미터의 내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다, 소장품 규모도 세계 최대 미술관 중 한 곳입니다. 역사의 확장된 플랫폼을 통해 6개의 전시를 동시에 열고 있었습니다. 가히 비엔날레에 준하는 규모여서 둘러보는데만 몇시간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1960년 이후의 미술을 소장하고 있는 이 미술관의 상설전시에서는 독일 작가들이 세계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에 열린 박물관의 첫 번째 전시회는 조셉 보이스,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셴버그, 사이 톰블리의 작품을 통해 미술관의 야심찬 사명을 인상적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전통 예술 형식을 구분하는 경계를 넘은 선구적인 예술가들이었죠.
확장된 예술이라는 사명을 30년 동안 고집스럽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요 컬렉션으로는 존 케이지, 빌 비올라, 안드레아 피치, 울프 보스텔, 레베카 혼 등이 있습니다. 물론 독일을 대표하는 생존 작가 안젤름 키퍼는 소장품 전시장 입구를 지키며 베를리너들을 환영합니다. 독일 미술의 교황, 요셉 보이스에게는 헌정하다시피한 별도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최신의 작품으로는 줄리 머레투와 양혜규도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2004년 함부르거 반호프는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프릭의 컬렉션을 장기 대여 받게 되며 컬렉션을 한층 업그레이드하기도 했습니다. 유럽과 북미 현대 미술 1500점 이상을 기부한 이 컬렉션은 미술관 본관 뒤편에 위치한 리크할렌 등을 통해 전시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남아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이 되기 위해서는 큰 손 컬렉터들의 아낌없는 기부가 필요충분조건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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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보이스를 레퍼런스 삼은 안드레아 피흘(Andrea Pichl)의 <Economic Values>는 아이디어가 신선한 전시였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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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AI시대의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 입문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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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작업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에서 다중세계를 질주하는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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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도착한 첫날 이 미술관부터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반가운 한국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어서입니다. 2월 25일부터 7월 20일까지 열리는 <Many Worlds Over>를 통해 김아영 작가가 베를린에 입성했습니다. 전시장인 H4 캐비넷 서관은 로비에 접해있어 접근성이 좋고,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해야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한 날은 오프닝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엄청난 미술계 사람들이 모여 들어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1979년생 작가는 기획전을 하고 있는 작가 중에 가장 젊은 나이였고, 이 아시아 여성 작가는 대규모 설치 작업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SF를 연상시키는 미디어 아트를 통해 생기를 불어 넣고 있었습니다. 이 전시는 미술관의 사상 첫 뉴미디어 작품을 포용하는 전시라고 합니다.
게다가 올해 작가는 '김아영의 해'라고 해도 좋을 만한 폭발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전시에 앞서 올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됐고, 5월 테이트 모던의 기획전시에도 출품됩니다. 뉴욕현대미술관 PS1(MoMA PS1)에서는 11월부터 개인전을 엽니다. 딜리버리 댄서 3부작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은다고 하니 꽤 기대가 됩니다.
김아영은 저에게 다학제적인 리서치를 통해 '근대성'을 탐구하는 작가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당시 한국 작가 중에 가장 젊은 나이에 출품하면서, 화제를 모았던 신예 작가였습니다. 당시 현대 음악 작곡가 김희라의 음악과 함께 설치와 퍼포먼스를 통해 문명사 속의 석유에 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한 학술적인 사변적 픽션(Speculative Fiction)을 선보인 바 있었죠.
2019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는 예맨 난민과 인터뷰를 하고 경계를 넘어온 이들의 삶을 사변적 픽션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2017년부터 발표한 <다공성 계곡> 연작의 일환이었죠. 이주민(Diaspora)이라는 개념 또한 근대성의 유산입니다. 작가는 면밀한 역사 연구를 통해 제국주의 시대 이후 부유하는 세계의 특징인 이주민의 삶을 들여다 본겁니다.
수년의 작업을 통해 관찰한 이 작가의 작업은 올곧게 '삶의 불안정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0년동안 국내외를 오가며 이주자로서의 살아온 작가 자신의 불안감이 지속성 있는 주제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치밀한 연구를 통해 적층된 가상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죠.
이번 전시를 이해하려면 24분의 미디어아트 <딜리버리 댄서의 구> 부터 만나볼 필요가 있습니다. 2022년 이 대표작을 선보인 갤러리현대의 전시 '문법과 마법'은 김아영의 변신이 인상적이었죠. 영화적인 영상미와 웹툰 작가와의 협업까지 하면서 기존보다 일반 관람객에게도 친근한 작업을 펼쳐보였습니다. 팬데믹 시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배달 플랫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담은 작품이었죠.
이 전시에서 등장한 도플갱어처럼 지독하게 얽히는 두 배달 라디어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의 세계관은 과거 기사를 통해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당시 작가는 "아시아가 예술에서 다뤄지는 방식은 위험한 곳이거나 페티시적 묘사뿐이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아시아 퓨처리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아시아 퓨처리즘의 발단이 된 레퍼런스가 있습니다. 리서치에 지쳐있던 시기에 작가는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아프로 퓨처리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의 가상의 미래를 그려내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예술에서 해방구를 발견한 겁니다.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의 핵심은 '가능 세계'입니다. 마블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멀티버스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서로 다른 가능 세계에 속한 만나선 안되는 두 주인공이 끊임없이 만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 게임 엔진과 생성형 인공지능 등의 기술의 도움을 주저않고 받았습니다. 두 주인공의 서사는 영화, 웹툰, 생성형 인공지능 영상 등을 넘나들며 표현력과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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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에서 웹툰 캐릭터로 그려진 주인공들의 이미지가 관람객을 맞는다. ©김슬기 |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 2024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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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모와 갈등을 표현한 설치 작품. ©김슬기 |
게임으로 만든 <딜리버리 댄서 시뮬레이션> ©김슬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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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베를린에서 공들여서 꾸민 전시장은 세계의 미술인들 앞에 선보이는 '김아영 입문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베를린 전시는 신작이 없이 2022년 이후 작가가 꾸준히 확장해온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를 총망라해 선보이는 전시였습니다. 두 편의 대표 영상 작업과 이와 연관된 설치, 게임으로 만든 <딜리버리 댄서 시뮬레이션>을 나란히 설치했습니다. 파란색 철제 기둥과 조명 등으로 꾸며진 공간은 사이버 펑크의 도시 서울에서 왔음을 알리며 강렬한 존재감을 선사합니다.
최근작인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을 저도 처음 접하면서, 확장되고 있는 세계관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이 영상은 2024년 호주 멜버른에 위치한 호주국립영상센터에(ACMI)에서 처음 소개한 작업으로 작년 광주 아시아문화전(ACC)에서 선보인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와 함께 3부작을 이룹니다.
이 영상에서 두 여성 라이더는 확장된 여러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됩니다. 서울이 수많은 가능 세계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두 주인공이 알게 되면서 다양한 시공간을 오가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는 인공지능 시대 속 변화하는 인간과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도입되는 기술 간의 상호작용을 반영한다고 작가는 설명했습니다.
베를린 전시에선 볼 수 없었지만 신작인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에서는 400일력을 쓰는 세계가 등장합니다. 시간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이죠. 영화 <삼체>를 연상시키는 야심만만한 세계관의 확장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현대인의 불완전성을 다루는 서사가 어디까지 확장되어갈지 궁금합니다.
자본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미술 작가는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 되어야합니다. 영화 촬영팀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스텝을 지휘하며, 집채만한 설치 작업을 위해선 다방면의 기술자들과 협업해야합니다. 미술관은 공장처럼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왠만한 스펙터클이 아니고서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내기도 어렵습니다.
온 세상이 인공지능을 외치는 시대에, 한 발 앞서 이를 도구로 사용한 것 또한 칭찬받아 마땅한 유연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아영은 스펙터클에 잠식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보기 드문 젊은 작가인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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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이 마음껏 걸어다닐 수 있는 설치 작품. Mark Bradford <Float (2019/2024)>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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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호스네들로바, 안드레아 피흘, 사미하 버크소이 등 6개의 대형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함부르거 반호프에서 가장 야심차게 선보이는 전시는 미국의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의 <Keep Walking>(5월 18일까지)이었습니다.
이 대담한 전시는 그림, 조각, 건물만한 초대형 설치, 영상 등 20년에 걸친 20개의 역동적인 작품을 선보입니다. 전시회는 인종, 성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아트페어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줄무늬 추상화로만 알고 있던 작가를 새롭게 발견한 전시였습니다.
초대형 작품 위를 관람객이 거닐거나,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도록 하는 모든 몰입형 전시가 관람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사회 정치적 문제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이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미국의 흑인들의 현실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작가는 독특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고향에서 가져온 포스터, 신문 스크랩과 같은 일상적인 자료를 통해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를 질문합니다. 이 전시의 공간은 특별한 기능을 합니다. 브래드포드의 작품에 묘사된 여정과 19세기 도착과 출발을 상징하는 기차역인 함부르크 반호프의 역사는 강력한 평행선을 그리고 있죠.
전시회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 전시관을 위해 처음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매달린 조각품 <Flyded Foot>입니다. 1980년대 에이즈 위기에 맞서 싸우는 의미를 담은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인 <피노키오 이즈 온 파이어>(2010/2015)도 거대한 방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다시 재작된 작품도 있습니다. 마음껏 걸어다닐 수 있는 바닥 설치 작품 <플로트>(2019/2024)도 소개됩니다. 방문객들은 이러한 작업에 물리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사회의 체계적인 폭력과 억압에 반응하는 자신의 움직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공간을 들어서는 것만으로 우리는 예술가가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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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미로 <At Home: Alice Neel in the Queer World>
- 3월 8일까지
20세기 위대한 여성 초상화가 앨리스 닐의 사적이고 내밀한 세계를 만났습니다. 힐튼 알스가 기획한 이 개인전에서 앨리스 닐이 퀴어 공동체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 전시됩니다. 작품에는 작가, 공연자, 예술가뿐만 아니라 친구와 이웃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죠. 작가의 긴 여정을 따라 변화하는 그림을 엿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이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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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으로 돌아왔지만,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네요.
너무 많은 미술관을 만나고 오니 고민만 많아집니다.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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