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최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가 작품상 등을 휩쓸었습니다. 영화가 너무 보고 싶지만 여행자의 신세인지라 잠시 미뤄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브루탈리즘의 승리를 기념(?)하는 특집편을 준비해볼까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도, 학교(SOAS)도 브루탈리즘 건축물이라 내적인 친밀함이 있거든요. 영화의 모델 마르셀 브루이어의 대표작이 뉴욕 휘트니 미술관인 것처럼, 바비칸 센터도 예술을 위한 공간으로 런던을 대표하는 곳입니다. 저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바비칸 센터를 다녀왔습니다.
27회 (2025.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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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브루탈리즘의 아이콘, 바비칸 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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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칸 센터의 중앙 광장에서 본 모습. ⓒBarbican Cent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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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바비칸 센터를 처음 찾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번째는 런던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의 한복판에 이렇게 거대한 흉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두번째로는 기괴한 미학과 대담함에 놀랐습니다. 바비칸 센터의 2개의 지하철역 사이 한 블럭을 통째로 채우는 크기는 한국의 그 유명한 1만여 세대 아파트 단지 못지 않게 컸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에게 브루탈리즘은 아무래도 미학적으로 보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으로만 배웠던 브루탈리즘에 대한 선입견은 런던에서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더군요. 런던 곳곳에서 대형 건축물로는 가장 많이 보이는 양식이었고, 1년 중 열 달이 흐린 잿빛 도시에 잘 어울리는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비칸 센터는 두 개의 미술관, 두 개의 극장, 세 개의 영화관, 콘서트홀이 있는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복합문화공간입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이 콘서트홀을 사용합니다. 덕분에 공연과 전시를 보러 거의 매달 이 곳을 찾다보니, 정이 들고 있습니다.
1950년대 영국에서 등장한 브루탈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도시 재건을 위해 콘크리트, 철, 유리 등 재료의 거친 질감을 드러내고 기하학적인 외관을 강조하는 게 특징입니다. 주재료인 콘크리트는 건축가에게 자유를 선물로 줍니다. 어떤 외관이든 거푸집에 시멘트와 모래를 붓기만 하면 콘크리트는 그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주거든요. 브루탈리즘은 그 상상력의 극한을 시험했던 20세기의 유산입니다.
건축가 체임벌린, 파월, 본은 도시의 라이프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축을 시도했습니다. 건축가들은 디자인을 하면서 르 코르뷔지에와 브루탈리즘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독자적인 스타일도 접목시켰습니다. 주변 도로보다 솟아 있고 고대 로마 요새와 프랑스 모더니즘, 지중해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등을 모두 접목시킨 '도시 속의 도시'를 구상한 겁니다.
이 야심만만한 계획을 통해 예술 센터를 중심으로 심지어 학교, 교회, 도서관, 인공 호수, 식물원까지 품고 있는 거대한 주거 단지가 탄생합니다. 40층 높이의 2,000개의 아파트, 맨션, 주택으로 구성된 주거 단지에는 4,000명 이상의 주민이 현재도 살고 있습니다. 당대 브루탈리즘이 빠른 속도로 공공 주택을 보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과 달리 중산층을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건축 현장의 상황은 무척 열악해 노동자들은 '바비칸 전투'로 알려진 파업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건설이 지연되고 영국 노동 역사의 모습도 바뀌었습니다. 바비칸 센터는 건축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고 개장한 뒤 198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완공식에서 이 건축물을 "현대의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외관만을 보고도 많은 이들이 비난을 하지만 사실 브루탈리즘 건축물의 치명적인 단점은 위압적인 외관보다는 비효율적인 공간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바비칸 센터를 방문하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코엑스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저에게는 입구와 출구, 각각의 공간들이 미로처럼 얽힌 이곳의 악명 높은 동선은 여전히 난공불락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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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런던 시민들의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 ©김슬기 |
그야말로 도시 속의 도시. ©Barbican Cent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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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서른 둘에 세상을 떠난 천재 화가, 노아 데이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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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LA에서 작업하는 노아 데이비스 ©Patrick O'Brien-Sm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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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Acres and a Unicorn>, 2007 ©The Estate of Noah Davis |
아내 카론을 이집트 여신처럼 묘사한 작품. <Isis>, 2009 ©The Estate of Noah Dav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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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의 영혼에 합니다. 그것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젊은 날 지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분투했지만 서른둘에 세상을 떠난 천재 화가가 있습니다. 작고 10여년 만에 그의 회고전은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중입니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유명세를 얻은 뒤, 2024년에는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과 바비칸 센터에 입성했습니다. 올여름 이 전시는 로스앤젤레스(LA) 해머 미술관으로 옮겨갑니다.
바비칸 센터의 아트 갤러리에서는 노아 데이비스(Noah Davis, 1983~2015)의 회고전이 2월 6일부터 5월 11일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가디언과 타임즈 등의 호평을 보고 궁금해 찾아간 전시는 예상치 못한 감동을 안겨줬습니다.
이 전시는 2007년부터 2015년 갑작스럽게 사망할 때까지 작가의 회화, 조각, 큐레이션 등 50여 점을 선보입니다. 소재는 정치와 시사, 일상, 고대 이집트, 가족사, 미국 미디어의 인종차별, 미술사 및 건축에 대한 관심까지 다양합니다.
아트페어의 데이비드 즈워너 부스에서 개별적으로 접한 그림과 달리 미술관에서 만난 이 작가의 풍성한 연대기는 그의 찬란하게 빛났던 짧은 삶에 공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애틀에서 태어나 변호사 아버지 아래에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빠졌습니다. 뉴욕의 명문 예술학교 쿠퍼 유니언에서 영화와 개념미술을 전공했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LA로 이주했습니다. 2004년 새 도시의 미술 서점에서 일하며 2004년 서점에서 일하며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마크 로스코, 피터 도이그의 도록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이들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일겁니다. 도시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은은한 색채 블록을 그려넣어 자신이 숭배한 로스코를 향한 오마주를 표현했고, 마술적 사실주의처럼 보이는 그의 인물들은 피터 도이그를 연상시킵니다.
화가로서 그는 소외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흑인의 '삶의 조각들'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찍은 사진을 소재로 상상력을 더해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그는 잠들고, 춤을 추고, 수영을 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플리마켓에서 발견하거나 직접 찍은 사진 속 이미지를 소재로 삼거나, 역사, 영화, 미술사 속의 소재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변형시켰죠.
2007년 친구 린제이 찰우드의 기획으로 처음 그룹 전시에 참여하게 됩니다. 데이비스의 초기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사진적 리얼리즘과 몽환적 분위기의 공존입니다. 2008년 첫 개인전 <Nobody>에서 선보인 인물화는 흑인들의 일상적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청록색과 라벤더색 등 과감한 색채 사용으로 초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40 Acres and a Unicorn>(2008)은 은은한 조명아래 이 그림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림엔 정치적 메세지가 숨어 있습니다. 제목은 미국 남북 전쟁 중 해방된 노예 가족에게 '40 에이커와 노새'를 주겠다는 실현되지 않은 법령을 뜻합니다. 역사의 가옥한 현실에 맞서 남자는 유니콘을 타고 있습니다.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우화 같은 그림입니다.
2012년, 그는 LA 알링턴 하이츠 주민들에게 예술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아내 카론 데이비스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뮤지엄(Underground Museum)을 공동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쏟아부어 상점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무료로 개방한 겁니다.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예술을 보는 방식, 예술을 구매하는 방식, 예술을 만드는 방식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열망이 있었습니다.
데이비스에게 작품을 빌려준 유일한 사람은 LA 현대미술관(MOCA)의 헬렌 몰스워스 뿐이었습니다. 바비칸 아트 갤러리 내에서 부분적으로 재현된 이 전시는 데이비스가 2013년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에서 큐레이팅한 첫 전시로, 댄 플래빈, 제프 쿤스, 마르셀 뒤샹 및 로버트 스미슨의 조각을 '모방'한 작품들로 구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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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반 데 로어의 디트로이트 라파예트 공원을 그린 작품이다. <The Missing Link 4>, 2013 ©The Estate of Noah Davis |
<Pueblo del Rio, Arabesque>, 2014 ©The Estate of Noah Dav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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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8)>, 2013 ©The Estate of Noah Davis |
<Seventy Works>, 2014 ©The Estate of Noah Dav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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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개성있는 붓터치가 보이는 사실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얼굴은 미완성으로 보일 정도로 단순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림들이 종종 수수께끼 같이 느껴집니다. 표정이 아니라, 그림이 담고 있는 공간과 상황을 통해 그는 비판적인 메세지를 담았습니다.
<The Missing Link> 연작을 통해 그는 대안적인 미술사를 새롭게 써내려갑니다. 그림은 그에게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해줬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는 일상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만 한 겹을 벗겨내면 다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The Missing Link 4>(2013)는 마치 바비칸 센터를 그린 것처럼 익숙해 보이는 풍경화입니다. 1959년 미스 반 데 로어는 디트로이트에 라파예트 공원을 완공했습니다. 이 곳은 흑인 커뮤니티가 여가를 즐기는 대표적인 곳이었지만 이상적인 건축물과 평화로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만의 배제된 공간은 불편한 감정을 줍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그림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흑인의 일상을 다채롭게 그린 <1975> 연작을 보면 청춘의 한 시절을 빛나게 그리는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LA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공공 주택 푸에블로 델 리오를 소재로 한 연작은 그가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그림으로 구현해낸 작품입니다. 빈곤과 갱단의 폭력에 물든 이 주택을 배경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성과 6명의 발레리나의 춤을 그려 넣었습니다. 소외된 지역에 예술을 전파하려했던 그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처럼요.
2011년 아버지를 암으로 떠나보낸 뒤, 작가 자신도 투병을 하게 됩니다. 전시 후반부의 가장 인상적인 작업은 <Seventy Works>(2014)입니다. 연부조직 육종이라는 희귀암으로 치료를 받으며 그는 병상에서 70점의 소품을 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준 스크랩북의 70장의 종이를 모두 사용하면 이 연작이 끝날 것임을 알았죠.
친구들의 사진, 잡지에서 잘라낸 이미지, 신문 스크랩 등을 배경으로 회화 콜라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작품 일부를 팔았지만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부분을 선물로 나눠주었죠.
2015년 그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에서의 자신의 개인전 개막일에 암의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아 데이비스는 생전에 미술사의 걸작들을 자신의 미술관에서 전시하면서도 흑인 미술이 지금과 같은 영광의 시절을 맞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노아 데이비스는 또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을까요.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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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두 소녀가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Untitled>, 2015 ©The Estate of Noah Dav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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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for My Dad>, 2011 ©Collection of Rubell Mus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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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위한 그림>은 예언적인 작품입니다. 노아 베이비스는 아버지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직후인 2011년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데이비스는 그림을 그리기 4개월 전 자신도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죠.
이 그림은 절벽 위에 서 있는 외로운 남자가 심연처럼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다른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별이 반짝이지만, 여전히 어두운 미지의 세계 속으로 작은 랜턴을 든 아버지는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꿈 속의 장면으로 읽어내곤 합니다. 노아 데이비스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작품 중 초상화로 부를 수 있는 작품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 또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두려움에 맞닥뜨리면서 그는 왜 아버지의 뒷모습을 그렸을까요.
그는 두려움, 공포, 고통만큼이나 사랑과 희망도 그리고 싶었을 겁니다.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이 남자는 표정은 분명 어둡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대담함과 감정적인 친밀감 등이 발휘된 그의 대표적인 특징이 고루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교훈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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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데우스 로팍 <론 뮤익>
- 2월 14일~4월 2일
작년 리만 머핀 서울에서 서정적인 풍경화로 큰 인상을 남겼던 콧수염 할아버지 작가를 기억합니다. 빌리 차일디시는 작년 런던 프리즈의 씬스틸러가 됐었는데요. 리만 머핀 런던에서도 또 다른 계절의 풍경화를 선오비는 개인전을 개막했습니다. 판화와 설치 작업, 자신이 쓴 음악과 책까지도 전시합니다. 백마를 탄 남자 그림을 보며, 저는 노아 데이비스가 떠올랐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닮은꼴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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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까지만해도 프라하에 있었는데요. 지금은 드레스덴입니다. 코피가 날까 걱정될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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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날씨는 양반이었습니다.
겨울에 동유럽은 오는 거 아니라고 왜 아무도 저한테 안 알려줬는지;;;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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