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모처럼 런던 소식으로 돌아왔습니다. 6월 6~8일 런던 갤러리 위켄드가 열리면서 런던의 갤러리들이 일제히 새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리버풀 비엔날레가 시작하고 날씨가 1년 중 가장 좋은 시기인건 맞지만, 왜 시기에 열리는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주말에 문을 닫는 갤러리들도 일요일까지 문을 열고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10월 프리즈 위크 만큼이나 미술관들도 분주합니다. 새 전시를 개막하는 곳이 많습니다. 신상 전시들을 발빠르게 만나고 왔습니다. 🤠
42회 (2025. 6.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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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생가인 블레넘 팰리스의 정원. 드라마 <브리저튼> 촬영지인데 왜 사진을 올렸는지 조금 있다 알려드림.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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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요시토모 나라, 런던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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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오프닝 파티 준비 중인 헤이워드 갤러리.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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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모리의 어린 시절 작가의 방을 재현한 공간과 평생 탐닉한 팝음반에서부터 전시는 시작된다. ©김슬기 |
드로잉, 설치, 페인팅 등 작가의 예술인생이 총망라됐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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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초기작에는 칼을 든 소녀가 섬뜩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김슬기 |
대지진 이후의 그림은 변화가 보인다. 핏빛 물위의 소녀.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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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도 가장 화제를 모으는 건 헤이워드 갤러리의 요시토모 나라 개인전(6월 12일~8월 31일)입니다. 영국과 일본은 섬나라라는점 외에도 문화적으로 정말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나라의 예술가들이 양국을 오가며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작년에는 쿠사마 야요이와 무라카미 다카시의 런던 전시가 나란히 열렸고, 올해는 요시토모 나라가 런던에 상륙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드로잉, 페인팅, 조각, 설치 및 도자기 등 150점 이상의 작품을 총망라해 선보이는 초대형 회고전이었습니다. 작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시작해 독일 바덴바덴을 거쳐 런던에 온 전시입니다. 나라의 대표적인 주제인 저항, 고독, 자유, 영성 등을 주제로 한 작업을 골고루 만날 수 있었습니다.
9일 오프닝 행사에 참석을 했는데, 정말 많은 미술계 '인싸'들이 운집한 걸 봤습니다. 보통은 이런 자리에서 작가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곤 하는데요. 이 은둔형 작가는 66세의 나이에도 언제나처럼 모자와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청년같은 차림으로 미술관을 거닐다가 꼬리를 자르는 도마뱀처럼 황급히 사라지더군요. .
전시장 입구에는 소년 시절 만화책과 음반 등 자신의 보물들이 작은 방을 재현한 공간과, 벽을 가득 메운 음반들이 가장 먼저 보입니다. 펑크와 록 음악, 대중 문화 등에 푹 빠져서 자랐던 그가 지금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게 해 준 추억의 공간을 재현한겁니다.
한국에도 너무나 유명한 요시토모 나라의 미술은 보는 것처럼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의 예술 전반을 다룬 이야기는 가을에 나올 제 책에서 만나보시길 바라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어린 시절 사과와 벚꽃이 유명한 아오모리의 미군 기지 근처에서 자라면서 그는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덕분에 방에 틀어박혀 혼자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았습니다. 미국 팝음악과 만화영화 등 대중문화가 외로움을 달래준 친구였죠.
나라가 90년대 독일로 유학을 떠났을 때 이 어린시절의 추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그는 유년기를 다시 마주하게 된겁니다. 칼을 들고 섬뜩한 표정을 짓는 소녀. 나라의 대표적인 도상이죠. 이 모순적 캐릭터의 탄생은 전후 세대로 저항의 60년대에 소년기를 보냈고, 반전-반핵 운동을 보면서 성장한 그의 삶이 만들어냈습니다.
나라의 예술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집단의 트라우마와 무의식을 반영하는 사회적인 예술입니다. 저는 간사이 대지진의 경험이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이번 전시를 통해 체감했습니다. 대지진 이후 소녀들이 큰 눈망울로 눈물을 흘리는 그림이 많았습니다. 그는 오랜시간 동안 애도의 미술에 집중했습니다.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시장 밖에 있었습니다. 나라는 아마도 현존하는 아트 상품에 가장 최적화된 아티스트일 겁니다. 미술계 인사들이 모은 오프닝 행사였음에도 한정판 옷과 가방, 각종 굿즈를 파는 아트숍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미술관인지, 유니클로인지 헷갈릴 정도로요. 저 또한 이렇게 순수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미술 전시를 만난 것은 정말 오랜만의 경험인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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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전시 공간을 채우는 설치 작업과 대형 회화들. ©김슬기 |
인파를 뒤로하고 바람처럼 사라진 요시토모 나라.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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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주말엔 켄우드 하우스의 숲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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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영국 귀족의 저택인 켄우드 하우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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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우드 하우스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공원. ©김슬기 |
햄스테드 히스에서는 런던 도심의 전망이 한눈에 펼쳐진다. 런던 최고의 뷰포인트.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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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를 비롯한 초상화들이 걸려 있는 다이닝 룸 ©English Heritage |
저택의 가장 유명한 공간인 도서관. ©English Herit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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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brandt van Rijn <Self-Portrait with Two Circles.>, 1665 ©김슬기 |
Johannes Vermeer <The Guitar Player>, 1672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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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는 작고 특색있는 미술관도 많습니다. 옛 예술가의 집이 미술관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저택이나 성이 공공 문화유산으로 변신한 곳도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런던에서 갈 수 있는 곳 중 켄우드 하우스(Kenwood House)만큼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런던 도심 킹스크로스역에서 약 30분 정도 버스로 북쪽으로 향하면 햄스테드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손흥민 같은 축구선수와 가수 스팅, 영화 배우 주드 로, 다니엘 크레이그 등 대중에 노출되지 않는 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사는 런던의 대표적인 부촌입니다. 이 지역은 10만평이 넘는 햄스테드 히스라는 광활한 공원을 끼고 있습니다.
과거 귀족의 영지였던 공원의 북쪽 입구에는 켄우드 하우스가 있습니다. 저는 계절마다 이 곳을 가보고 있는데요. 미술관보다도, 공원이 너무 아름다워서 저는 진짜 영국을 만나고 싶으면 꼭 이 곳을 가보라고 보는 이들마다 추천하고 있습니다.
영화 <노팅 힐>에서 시대극을 촬영하는 줄리아 로버츠를 찾아 휴 그랜트가 방문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 만났던 지난 봄과 달리 초여름의 공원은 아주 초록초록했습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선 요즘 같은 날씨에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햇볕에 미친 영국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딜가나 담요 한 장 깔고 드러누워 피크닉을 즐기고 있죠. 주말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날씨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가벼운 복장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많습니다. 햄스테드 히스는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전화가 터지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숲을 헤쳐 나와 언덕에 오르면 런던 도심이 한 눈에 보이는 기가 막힌 뷰포인트가 나타납니다. 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꼴 가봐야할 곳으로 런던 도심에 프림로즈 힐이 있다면, 외곽에는 햄스테드 히스가 있습니다.
이 영지는 18세기에는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1754년 1대 맨스필드 백작인 윌리엄 머레이(William Murray, 1705~93)가 최종적으로 구입해 아내 엘리자베스와 주말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대적 확장에 들어갑니다. 지금의 켄우드 하우스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건축가 로버트 아담이 만든 건축물입니다. 그는 집을 확장하고 유명한 도서관을 비롯한 많은 방을 설계했죠.
여러차례 확장을 거친 이 저택은 6대 맨스필드 백작 앨런 데이비드 머레이(1864~1935)가 1914년에 매각을 결정하면서 가문의 손을 떠나게 됩니다. 1대 이베아 백작 에드워드 세실 기네스(1847~1927)가 집과 바로 주변 74에이커를 구입해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인들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소유자의 이름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그는 기네스 맥주로 유명한 양조 가문의 2세였습니다. 사세를 확장하며 그는 미술품 수집에도 열을 올렸고 1928년 63점의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하며 누구나 이 저택에서 그림을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건물은 그의 사후에 다시 정부의 소유가 되고 대대적 수리를 거쳐 2013년부터 공개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전형적 귀족의 저택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브리저튼>을 보셨다면 이들이 살았던 집의 구조에 익숙할텐데요. 켄우드 하우스에서도 신고전주의 양식의 디자인이 돋보이는 아담 도서관(Adam Library),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고전 걸작 컬렉션이 있는 다이닝 룸,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의 그림이 있는 뮤직 룸(Music Room)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영국의 역사와 문화를 '영드'로 배웠는데요. 1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 귀족 가문의 하인들을 주인공으로 만든 <다운튼 애비>를 보면서 영국의 전통 귀족 사회를 제대로 배웠습니다. 무도회와 손님 응대가 이뤄지는 응접실, 식사를 하는 다이닝 룸, 식후 차와 디저트를 즐기는 뮤직룸이 각각 필요한 이유를 덕분에 깨달았죠.
이베아 백작의 63점의 컬렉션은 토마스 게인즈버러, 조슈아 레이놀즈, 조지 롬니 등 18세기 후반의 영국 초상화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네덜란드 회화도 유명합니다. 렘브란트의 노년의 자화상(1665)을 만날 수 있죠. 무엇보다 가장 유명한 그림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기타 연주자>일 겁니다. 그의 딸 마리아로 추정되는 어린 소녀가 기타 연주를 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인데요. 유럽에서 국립 미술관과 영국 왕실을 제외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베르메르의 작품일 만큼 희귀한 컬렉션입니다.
컬렉션에서 17점이나 차지하는 작가 왕립 예술 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18세기 영국의 대표 초상화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입(Joshua Reynolds, 1723~1792)니다. 1752년 젊은 레이놀즈가 이탈리아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파리에서 그린 <캐서린 무어의 초상화>부터 1790년경 시력을 잃기 전에 레이놀즈가 그린 마지막 그림 중 하나인 <미스 콕스와 조카딸의 초상화>까지 켄우드 하우스는 이 작가의 처음과 끝을 모두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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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ua Reynolds <Miss Cocks and Her Niece>, 1789–90 ©English Heritage |
George Romney <Spinstress>, 1784 ©English Herit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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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우드 하우스에 초상화가 걸려 있는 많은 여성 중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엠마 해밀턴(1765~1815)입니다. 엠마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뮤즈입니다. 그는 비천한 신분으로 구국의 영웅인 넬슨 제독을 사로잡았고, 남편과 애인과 함께 공공연하게 삼자연애(ménage à trois)를 하면서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당대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였죠.
본명이 에이미 라이언(Amy Lyon)인 이 여인은 1765년 체셔의 광산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0대 초반부터 하녀, 연극 배우, 매춘부 등으로 일하며 신분 상승을 꿈꿨습니다. 16세에 귀족의 정부가 되었다가 임신을 하며 쫓겨나기도 하죠. 17세에 하원의원 찰스 그레빌의 정부가 되면서 놀라운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레빌은 자신의 정부를 예술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에게 소개합니다. 47세의 롬니는 영국 최고의 초상화 화가였고 그레빌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죠. 롬니는 엠마를 무려 9년 동안 70점이 넘게 그림으로 그립니다. 연극 포즈에 재능이 있는 그는 최고의 모델이었습니다.
롬니의 집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은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뮤즈와의 만남을 갈망했습니다. 그레빌과 그의 삼촌인 윌리엄 해밀턴 경을 포함한 친구들의 사교 모임에 열광을 더했죠. 엠마는 조슈아 레이놀즈, 존 호프너, 프랑스 작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등 초상화가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실 잣는 여인(Spinstress)>(1784)은 롬니의 엠마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입니다. 실을 부드럽게 만지는 포즈는 성적인 암시를 하고 있죠. 그림 속 개장에 갇힌 새는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 속에서 새는 날아가버렸죠.
그레빌은 점점 더 유명해지는 아름다운 정부를 자랑스러워했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길 바랬고 먼저 엠마를 버려야 했습니다. 삼촌 윌리엄 경이 나폴리에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엠마를 소개했고 삼촌은 첫 눈에 반하게 됩니다.
그레빌은 엠마와 34살 나이 차이가 나는 삼촌에게 보내 함께 살도록 합니다. 21세에 나폴리에 도착한 그는 버림 받았음에 큰 충격을 받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가까워졌습니다. 엠마는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나폴리 생활에 만족하게 됩니다.
윌리엄은 가정교사를 고용해 그에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역사 및 노래, 예술을 가르쳤습니다. 엠마는 미모와 매력으로 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이 도시의 남자들을 사로잡아 나폴리 사교계의 여왕이 됩니다. 영국에서 조용히 결혼을 하고 레이디 해밀턴이 되면서 신분상승의 꿈은 마침표를 찍게되죠.
진짜 드라마는 이제 시작입니다.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의 부인으로 그는 넬슨 제독을 맞게 됩니다. 1798년 8월 나일강 전투에서 넬슨이 놀라운 승리를 거둔 후, 엠마와 윌리엄 경은 넬슨의 기함이 나폴리 만에 도착했을 때 열렬하게 환영했죠. 무도회와 파티를 즐기며 영웅으로 칭송받은 넬슨은 해밀턴 가족의 집에 초대를 받았고, 엠마와 넬슨은 밀애를 합니다.
부부는 넬슨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 영국으로 귀국하게 됐죠. 넬슨은 아내와 엠마 중에서 엠마를 선택합니다. 넬슨의 자금으로 구한 저택에서 딸을 키우며, 넬슨과 윌리엄 경, 엠마는 셋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귀국 3년 뒤 윌리엄 경이 세상을 떠났고, 2년 뒤에는 다시 넬슨 제독이 전장에서 사망했죠.
넬슨의 사망 후 주변 사람들은 그와 멀어졌고 사치스런 생활에 빚더미에 앉게 됩니다. 넬슨의 유품을 팔며 버티던 그는 넬슨이 쓴 사적인 편지를 출판한 뒤, 전국민의 지탄을 받고 프랑스로 도망치다시피 떠나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엠마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은 모델이 되어 남긴 그림들인 것 같습니다. 정말 소설이라고 해도 믿기 힘들법한 극적인 인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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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의 특별전 <상속녀> 전시 전경.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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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Singer Sargent <Mrs Wilton Phipps>, 1884 ©English Heritage |
John Singer Sargent <This portrait of Daisy>, 1898 ©English Herit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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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여인들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초여름 켄우드 하우스에서는 모처럼 특별전을 열고 있었습니다. < Heiress: Sargent's American Portraits>(5월 16일~10월 5일)는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초상화 8점과 10점의 목탄 드로잉 등을 한 자리에서 보는 전시입니다. 사전트 의 사망 100주년을 맞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대형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시기에 영국에서도 의미있는 전시가 함께 열리게 된 겁니다.
달러 공주(Dollar Princesses)라는 말이 있습니다.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102명의 미국 여성이 영국의 귀족 계급과 결혼했고, 그보다 더 많은 여성이 상류층과 결혼했죠. 백만장자의 딸들이 돈다발을 싸들고 국제 결혼을 하는 게 유행이 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비판을 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가 됩니다. 그들은 '달러 공주'라는 멸칭으로 불렸습니다.
<다운튼 애비>의 안주인 코라 백작부인이 대표적인 달러 공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영국에서 자신의 높은 지위를 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대 최고의 인기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초상화를 그리는 거였죠. 사전트는 102명 중 무려 30명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사전트의 별명의 '사교계 화가'였던 건 우연이 아닙니다.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고 화려한 화풍으로 그는 미국에서 온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겁니다.
사실적 화풍으로 유명했던 사전트의 그림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1884년 윌튼 핍스 부인의 초상은 그가 존경했던 에두아르 마네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그림의 배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개인사를 더 깊이 파고들 때, 고정관념은 깨집니다. 모두가 부유한 것은 아니었으며, 진짜 사랑에 빠진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큰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활동했고 아내만이 아니라 어머니, 정치가, 운동가, 개혁가 및 자선가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례로 1904년 낸시 랭혼의 영국행은 결혼의 의도는 신분 상승이 아니었고, 영국의 사냥과 사교 생활이 그를 매료시켰습니다. 낸시의 능력은 정치에서 빛을 발했고, 하원에 의석을 차지한 최초의 여성 의원이 됩니다.
전시는 켄우드 하우스가 소유한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서퍽 백작 부인이 된 데이지 레이터(Daisy Leiter)를 중심으로 등 네 명의 미국 상속녀의 초상화와 삶을 소개합니다. 데이지는 켄우드 하우스에 걸려 있는 400년에 걸쳐 수집한 서퍽 컬렉션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런던 사교계를 주름잡은 얼마나 대단한 유명인사들이 되었는지 그 사연도 빼곡히 적혀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사전트의 드로잉 중에는 블레넘 팰리스(Blenheim Palace)에서 가족 초상화로 만났던 바로 그 여인도 있었습니다. 켄우드 하우스를 찾기 불과 1주일 전 저는 블레넘 팰리스를 찾았습니다. 옥스퍼드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교외에는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영지를 보유한 궁전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식 정원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화려한 모습이었고, 실내도 얼마나 화려하고 큰지 영국에서 왕궁보다 큰 유일한 궁전이라고 하더군요.
이 곳은 영국에서 가본 가장 놀라운 관광지였습니다. 18세기 지어진 궁전의 화려한 실내뿐만 아니라, 하인들의 생활 공간과 주방, 마굿간 등을 보존해 놓아서 마치 민속촌을 찾은 것처럼 신기한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하인의 식탁 옆에는 주인들이 울리는 종까지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영국 시대극에서 숱하게 봤던 하인들의 생활 공간은 드라마와 똑같았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전쟁 영웅인 말보로 공장의 후손인 윈스턴 처칠은 사촌의 저택인 이 집에서 태어나 매년 사촌과 함께 휴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방에는 열정적인 화가이기도 했던 그가 남긴 이 궁전을 그린 풍경화들이 잔뜩 걸려 있었습니다.
한 방에 걸려 있던 9대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처칠의 가족 초상화가 사전트의 작품이었는데요. 이번 전시에서 보게 된 말버러 공작 부인이 된 콘수엘로 밴더빌트의 드로잉은 초상화 속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옥스퍼드 여행에서 만난 그림과 런던 교외의 미술관이 접점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우연한 만남이야말로 여행이 가져다 주는 가장 흥미로운 선물일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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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의 <9대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처칠의 가족 초상>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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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trine C.122.A side A with 23 Treatment of the Dead objects at Pitt Rivers Museum>, 2025 ©Sprüth Magers |
<A terminal escape from the place that binds us>, 2025 ©Sprüth Mag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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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갤러리 위켄드 기간 동안에는 부지런히 동선을 짜서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갤러리도 많이 둘러봤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매력적인 전시를 보여준 곳은 런던 메이페어에 자리잡은 독일 화랑 스프루스마거스에서 열린 갈라 포라스 김(Gala Porras-Kim)의 개인전 <The categorical bind>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통해 2023년 대규모 전시를 처음 한국에서 선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같은 시기 리움미술관에서는 한국과 북한의 국보를 마치 연보처럼 나란히 드로잉으로 그려 놓고 비교를 하는 학구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죠.
이번 전시도 박물관 탐험가가 된 작가의 다채로운 평면작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작품을 마주할 때는 호기심이 일게하고, 대상의 정체를 알고나면 왜 이런 표현방법을 선택했는지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드로잉, 페이퍼 마블링으로 만든 평면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연약한 매체의 특성상 변형되기 쉬워보였거든요.
범주형 바인딩이라는 제목처럼 분류학적 접근 방식과 과학적 수집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작가의 대표적 작업인 '인덱스 드로잉(index drawings)'에서는 그림으로 만든 가상의 컬렉션입니다. 예를 들어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미술관의 소장품을 파헤치는데, 이 기관의 분류체계는 시가이 지나면서 바뀌었고, 작가는 유물과 미술로 각각 분류된 작업을 나란히 걸어놓고 무엇이 다른지 질문을 던지죠.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는 <우리를 묶는 장소로부터의 최종적인 탈출>의 정체를 알고 나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2000년 된 인간 유해의 사후 세계를 고찰하는 작품이거든요. 그림 옆에는 시신의 소유이 언제 중단되는지 묻는 미술관 관장에게 보낸 편지가 놓여 있습니다. 옆에 걸린 물감이 소용돌이치는 회화는 대안적인 최종 안식처를 제안합니다. 박물관 이면의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인류학과 고고학에 유형학을 도입한 최초의 박물관 중 하나인 옥스퍼드 대학의 피트 리버스 박물관(Pitt Rivers Museum)의 소장품도 소재로 사용합니다. 출처가 아닌 형식적 또는 기능적 유사성에 따라 자료를 재분류해 자신만의 박물관을 구축하죠. 이 박물관은 런던에서 레지던시로 작업을 하면서 발견한 새로운 '금광'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검은 그림은 흑연 드로잉 <Burial chamber scene>입니다. 무덤 내부에서의 풍경화랄까요. 작품에 가득한 어둠은 우리의 문화 유산에 대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무지를 은유합니다. 박물관 연구 체계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자신의 예술 속에 담아내는 흥미로운 작가입니다. 9월에는 국제갤러리에서 전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만날 전시가 무척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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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디 콜스 HQ <Ugo Rondinone
the rainbow body>
- 8월 2일까지
이번 주말 런던 최고의 사진스팟이 된 곳은 새디 콜스 HQ입니다. 리버티 백화점 옆에 있는 이 공간은 번화가로서는 드물고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요. 무지개색의 인간 이 형형색색의 공간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왁스와 흙으로 만든 무용수들입니다. 초기의 누드들은 화장을 한 채 땅에 묶여 있었다면, 무지개 빛 인간들은 육체가 빛으로 용해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하는데요. 종교적인 성격의 작품이지만, 그저 팬시하고 화려하게만 보였습니다. |
- 빅토리아 미로 <Victoria Miro: 40 Years>
- 8월 1일까지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가 40주년을 맞아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갤러리 두 곳과 야외공간을 모두 사용해 41명의 대표 작가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모았죠. 앨리스 닐, 폴라 레고, 셀리아 폴, 크리스 오필리, 서도호, 엘름그린&드라그셋부터 사라 체, 플로라 유크노비치까지. 그야말로 지난 반세기 영국 미술의 집대성입니다. 미술관 전시 못지 않은 화려한 전시였습니다. 한 시대를 증언할 수 있는 화랑이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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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런던 빅토리아파크 근처 운하변에는 젊은 친구들이 자석처럼 몰려든다. 영국 친구들이 불금을 보내는 중.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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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스위스 바젤에 있습니다. 독일과 남프랑스까지 돌고 돌아갑니다.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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