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읽기 쉽지 않은 낯선 예술가들 속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핀란드 미술관의 첫 '구면'은 토베 얀손(1914-2001)이었습니다. 핀란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국민 캐릭터 무민의 작가죠.
더듬더듬 근대미술의 계보를 따라가는 길목의 초반에 20대인 1941년에 그린 자화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동화 작가로만 알고 있던 저에게는 당당한 자세의 자화상이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얀손은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이 자화상들은 그녀가 단순히 아동문학의 작가임을 넘어서, 본격적인 현대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예술가임을 보여줍니다.
조각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 받은 덕분인지 얀손은 아주 어릴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10대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미술 교육을 받게 됩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겨울, 그녀는 옛날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반드시 주인공은 왕자공주가 아니어야 했고, 그녀는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무민트롤’이라 이름을 붙이죠.
한동안 잊고 있던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 1945년 완성한 이야기가 바로 <무민 가족과 대홍수>입니다. 지금은 뚱뚱한 몸집에 귀여운 하마같은 모양새지만, 처음의 무민은 뿔달린 붉은 눈의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을 위한 만화도 아니었죠. 그럼에도 만화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더 이상 빚과 월세 걱정에 시달리지 않게 되자 토베는 다시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 지금 남아있는 그의 유화들은 화가 얀손의 열망이 만들어낸 작품들이죠. 개인전도 열고 열심히 그림을 발표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민 만화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1955년 토베 얀손은 '세기의 사랑'을 만납니다. 말년까지 반세기를 함께 하는 연인 툴리키 피에틸레를 만난거죠. “사랑해, 나는 뭐에 홀린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차분해졌어. 우리에게 닥쳐올 어떤 일도 겁나지 않아”라는 편지를 쓸정도로 툴리키를 사랑했습니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은 두 사람은 세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핀란드 만에서 한참 나간 곳에 위치한 클로브하룬이라는 작은 섬에 둘만의 오두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평생 함께하며 얀손은 무민 이야기를 써내려갔죠.
1942년의 얀손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했을까요. 젊은 예술가의 자화상을 보는 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가 그 빛나는 미래와 성공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눈에 익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헬레네 슈에프벡(Helene Schjerfbeck, 1862-1946)의 <검은 배경, 자화상>(1915)이었습니다. 그녀는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자 19~20세기를 걸쳐 최고의 모더니스트 화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아테네움 미술관은 200점 이상의 헬렌 슈예르프벡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걸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로 평생 장애를 갖게 된 화가였지만 80대까지 활동하며 40여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자화상의 변천을 쭉 따라가보면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만년에는 표현이 단순해지고 텅빈 모습으로 표현되어 <핀란드의 뭉크>로도 불렸죠.
검은 배경의 이 초상은 그림에서 외부 요소를 제거해 완전히 독특하고 현대적인 표현에 도달한 만년의 대표작입니다. 미술관에서 그녀의 초기 사실적인 작품들을 함께 보면서, 얼마나 대담한 변화를 거쳐 여기에 도달했는지 알게 되어 더 놀라웠습니다.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에 능숙해 붓놀림으로 사과의 영혼을 포착할 수도 있었던 화가가 예술가로서의 후반기에 텅빈 표정의 자신의 얼굴을 검은 바탕 속에 그려 넣은 겁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려진 가장 유명한 자화상일겁니다.
런던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도 2020년 이 화가를 조명된 바 있지만, 이 작가는 올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헬레네 슈예프벡의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자화상까지 포함하고 초상화, 정물화 및 풍경화를 포함한 약 60점의 작품을 소개하는 성대한 전시입니다.
<침묵을 보다: 헬레네 슈예프벡의 그림(Seeing Silence: The Paintings of Helene Schjerfbeck)>라는 제목처럼 뉴욕에서 건너간 그녀의 침묵하는 자화상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국민 화가의 메트 입성에 핀란드인들도 무척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