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탈린은 6월 말이었지만, 두꺼운 외투를 입어야할 정도로 쌀쌀했습니다. 남프랑스의 폭염에 지쳐 있다가, 이틀만에 다시 떠난 북유럽의 날씨는 적응이 잘 되지 않더군요.
에스토니아 미술관(The Art Museum of Estonia)은 1919년 설립된 에스토니아의 국립 미술관 네트워크입니다. 5개의 미술관을 운영하는 이 미술관의 공간들은 탈린 중심부에 옹기종기 모여있더군요.
중세부터 바로크 시대까지의 역사적 교회 미술은 니굴리스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해외 미술은 카드리오르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요하네스 미켈의 미술 컬렉션은 미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었고, 20세기 모더니스트 에스토니아 예술가 아담슨-에릭의 예술은 아담슨-에릭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죠.
시간이 부족한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곳은 18세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에스토니아 미술을 소장한 쿠무 미술관(KUMU Art Museum)입니다.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이후 1993년 공모를 시작해 2006년 완성된 신축 건물이라 반짝반짝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현대 미술관의 역할을 하는 이 공간은 멀리서 보면 청록색의 배처럼 보이는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우가 길쭉한 반달 모양의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니, 1층 그레이트홀에서는 동시대 미술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고 2층부터는 상설전시가 펼쳐졌습니다.
상설 전시는 3층에서 시작되며, 18세기와 19세기의 발트해 독일 예술 유산과 20세기 전반의 에스토니아 민족 예술에 대한 개요를 만날 수 있습니다. 4층에서는 소련 에스토니아 미술과 1990년대 미술이 전시됩니다. 상설 전시장에는 여러 프로젝트 공간도 포함되어 있었죠. 5층에는 현대미술관이 있으며, 정기적인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1층 그레이트홀에서 처음 만난 예술가는 아이슬란드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화가인 라그나르 캬탄손(Ragnar Kjartansson)이었습니다. <소년과 소녀, 덤불과 새(A Boy and a Girl and a Bush and a Bird)>는(5월 16일~9월 21일) 이 작가의 에스토니아 첫 개인전이었는데요.
팝 음악, 고전 미술이 다재다능한 작가의 손끝에서 하나로 만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격변에서 영감을 얻는 예술가는 먼저 6개의 스크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미디어가 관람객을 둘러싼 원형의 공간으로 초대하더군요. <내일은 없다(No Tomorrow)>(2022)는 기타를 든 여인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합창을 들려줍니다. 폭력이 만연한 상황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몸짓과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신작 회화가 맞은편에 걸려 있더군요. <아카디아의 평일들(Weekdays in Arcadia)>(2025)은 화산섬인 아이슬란드의 이국적 풍광 속에 점점이 박힌 인물이 숨어 있는 작품이었는데요. 무척 이국적이었습니다. 상설 전시장에도 그의 영상 작업이 숨어 있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캬탄손 예술의 모티프는 사랑, 정체성, 우울, 남성성, 힘, 무력감이라고 합니다. 페미니즘 미술과 고전적인 풍경화가 대화를 나누고, 무자비한 자기 비판과 권력에 향한 조롱 등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그는 보여줍니다. 미술사의 관습을 비틀고 탐구하는 아이슬란드 작가와의 만남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