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미술관은 건축물과 산책하기 좋은 주변 환경, 환상적인 뷰로 미술에 관심이 크지 않은 이들조차도 방문하면 감탄하게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미술관 러버들에게는 이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미국 미술' 또한 특별한 곳이죠.
7층 상설 전시 <"무제"(미국)>에서는 그야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계보를 한 눈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전시는 강변을 향해 난 창문을 밝히는 동명의 작품을 통해 미술관과 그 너머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낸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는 연인과 함께 머무는 집을 밝히던 전구라는 일상적인 소재로 사랑, 상실, 애도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이 작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꿈, 꿈꾸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알고 있는 미국은 여전히 빛이 있는 곳, 기회가 있는 곳, 위험이 있는 곳, 정의가 있는 곳, 인종차별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 굶주림과 과잉이 있는 곳, 쾌락과 성장이 있는 곳입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노력과 공동의 헌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전시는 예술가들이 상상하고 제시한 ‘미국’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펼쳐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에드워드 호퍼가 기다리고 있었죠. 두말할 필요없이 휘트니 미술관을 대표하는 간판 작가입니다. 유화 220점을 포함해 무려 3151점이라는 세계 최대의 호퍼 컬렉션을 소장한 곳이거든요. 작가와 미술관은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운영한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에서 호퍼는 1920년 1월,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에는 유화 16점이 걸렸으나,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죠. 스튜디오 클럽이 1928년 문을 닫기까지 호퍼는 8번의 전시에 참여했는데요. 1930년, 휘트니가 호퍼의 <이른 일요일 아침(Early Sunday Morning)>을 2000달러에 직접 구매하면서 관계는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호퍼의 생전 1950년과 1964년 두 차례 로이드 굿리치가 기획한 두차례 회고전은 그를 미국의 대표 작가로 만드는데 결정적 공헌을 합니다. 그리고 1968년 호퍼의 아내 조세핀 니비슨 호퍼는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의 모든 작품을 휘트니 미술관에 기부했죠. 덕분에 서울에서도 화제의 전시를 열었던 미국 국민 작가의 대표작을 한 눈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른 일요일 아침>은 얼핏 보면 이 평범한 미국의 상점의 모습을 왜 그렸을까 궁금증이 생기는 작품인데요. 호퍼의 작업실(워싱턴 스퀘어 노스 3번지)에서 가까운 세븐스 애비뉴 사우스의 실제 건물을 그렸습니다. 호퍼 스스로 "세븐스 애비뉴의 거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건물을 늘이고 압축하는 변형을 가했죠. 휘트니 큐레이터 카터 포스터에 따르면, 호퍼는 창을 하나 추가하여 건물을 길게 늘이는 동시에 아래층 상점 입구를 추가해 압축 효과를 만들었고, 간판 글씨를 의도적으로 판독 불가능하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 붕괴 직후인 1930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대공황 초입의 미국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비평가 블레이크 고프닉은 이 그림에서 "뼈에 사무치는 보수주의, 그리고 당대 가장 야심적인 유럽 미술에 대한 명백한, 거의 논쟁적인 저항"을 읽어냈죠. 미국인들은 지금은 사라진 미국의 거리 모습을 보며 향수를 느낍니다. 저는 대도시의 외로움을 그리는 작가로 21세기의 사랑을 받는 호퍼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쓸쓸한 풍경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적갈색 벽돌로 쌓은 2층과 녹색의 상점으로 구성된 완벽한 조형미에 불가능한 상상력이 더해졌습니다. 재미있는 건 세븐스 애비뉴는 남북 방향 도로이므로 이런 동서 방향 그림자는 물리적으로 발생할 수 없거든요. 호퍼가 사실적 정확성보다 감정적 진실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호퍼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나이트호크스>는 시카고 미술관에 있지만, 휘트니는 이 작품의 19점의 습작 드로잉 전부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6차례의 회고전으로 뉴욕행 기차를 탈때마다 뉴요커들은 열광적으로 이 작품을 환영했죠.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관람객을 영원한 바깥의 관찰자로 위치시킨다는 점이죠. 휘트니 미술관은 이 두 작품을 함께 전시한 바 있으며, "유사한 건축적 형태, 색채, 고독의 주제를 공유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 '반드시 봐야할 작품'으로 손꼽히는 재스퍼 존스의 <세 개의 깃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장-미셸 바스키아의 <할리우드 아프리칸스>, 앤디 워홀, 알렉산더 칼더 등 20세기 미국 미술의 정수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공간을 거닐어 보는 경험도 특별했습니다. 당당하게 백남준의 귀여운 <자석 TV> 작품도 한 켠에 놓여있더군요.
보기 드문 작품이 있었는데요. 숨기고 싶었던 모습을 가리던 가발과 화장, 선글라스, 연출된 표정, 사고를 입은 앙상한 몸까지도 그대로 드러낸 앤디 워홀의 초상화입니다. '영혼 수집가'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앨리스 닐은 워홀의 '가면'을 벗겨내고 워홀의 내면에 숨겨진 연약함을 포착해냈습니다. 자화상을 숱하게 그린 워홀이었지만, 이 희귀한 초상화만큼 앤디 워홀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미술관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남았습니다. 서쪽 강변을 바라보는 5층에는 유명한 장소 특정적 작품이 설치되어 있죠. 이 알록달록 의자들은 메리 하일만이 2025년 재개관 10주년을 맞아 설치한 <롱 라인(Long Line)>입니다. 사색과 휴식을 위한 공간을 통해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를 성찰하는 장소를 만들어냅니다. 관람객들은 작품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예술이 되는 체험을 하게되죠. 1960년대 반문화와 기하학적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롱아일랜드와 캘리포니아 해안의 파도에서 영감 받았다고 합니다. 허드슨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곳은 미술관 최고의 포토스팟이 됐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지금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4월 현재 제82회 휘트니 비엔날레도 한창 진행 중이더군요. 하반기 하이라이트 전시는 10월 14일 개막하는 로이 리히텐슈타인 대규모 회고전으로, 2013년 이후 처음이자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가을도 제법 뜨거워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