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길었던 여행의 마지막 도시 로마입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는 "로마는 온 도시가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감탄이 나옵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인파와 지저분한 거리를 제외하면 로마는 정말로 감탄이 나오는 도시였습니다. 어디를 찍어도 그림 같은 이 도시는 폐허조차 아름다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미술관입니다.
먼저 바티칸 박물관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도 마지막으로 들려드릴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14회 (2024.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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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로마를 만나기 가장 좋은 포로 로마노 전경.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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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문지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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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컬렉션의 끝판왕, 바티칸 박물관. 솔방울 정원의 'Sfera con sfera'가 보인다. ⓒVatican Muse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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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미술관 그랜드투어를 계획하려면 로마는 반드시 마지막 종착지가 되어야 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바티칸 박물관을 만나고 나면 모든 미술관이 시시해질 수도 있어서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로마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벌써 500살이 넘는 나이가 되었다는게 놀라운 일입니다. 현재 약 70,000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20,000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교황을 향해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선물들은 다시 이 곳의 소장품이 됩니다. 지금까지처럼 이 뮤지엄 컬렉션은 끊임없이 확장될 수밖에 없죠.
바티칸 뮤지엄은 예매가 필수이고, 패스트 트랙 입장권을 끊지 않으면 줄을 몇시간을 기다려야할 정도로 관람객 수가 많습니다. 8시 개장을 앞두고 보통 새벽부터 입장을 위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 공국으로 들어서는 이 뮤지엄 입구에서는 특별한 문지기가 지키고 있습니다.
망치를 든 노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와 붓을 든 청년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입니다. 1932년 박물관 출입문을 만들면서 당시 당시 교황 비오 11세의 문장 좌우에 두 거장을 나란히 새겨넣었습니다. 둘의 흔적은 정말로 바티칸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다 바치다시피한 이 도시 국가는 이들을 출입문에 새겨서 기리고 있었습니다.
두 거장의 인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0.44㎢)의 입국 심사를 마치셨다면, 눈앞에 솔방울 정원이란 별명이 붙은 피냐 안뜰이 펼쳐지실겁니다. 로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소나무는 로마의 상징입니다. 4m 높이의 솔방울 동상이 이 곳에 자리잡은 이유죠.
정원 중앙에는 인기 만점의 조각이 있습니다. 금색의 갈라진 지구 모양 청동 조각은 '천체 안의 천체(Sfera con sfera)'입니다. 아르날도 포모도로가 만든 이 작품은 파괴되고 있는 지구를 표현했습니다. 솔방울 조각 뒤편의 건물은 '신관'이라는 뜻의 브라초 누오보(Braccio Nuovo)로 고대 로마 조각 전시장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연간 600만명 이상(2023년 676만명)이 찾는 방문객수 세계 2위의 뮤지엄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알고 있는 '월드 클래스' 작품이 있어서일 겁니다. 바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벽화죠. 하지만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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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의 문지기는 노인 미켈란젤로(왼쪽)과 청년 라파엘로. ⓒ김슬기 |
로마의 상징인 소나무를 솔방울 조각으로 표현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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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시스티나 채플에는 찰칵 소리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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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신을 위해 만든 가장 화려한 복도가 아닐까. ⓒVatican Muse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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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조각 전시장, 브라초 누오보 ⓒVatican Museums |
하나 뿐인 '진품' <라오콘 군상>. 기원전 2세기.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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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은 어디까지나 신과 교황을 위해 세워진 세계 최대의 가톨릭 뮤지엄입니다. 교황의 마차부터 역사 문서, 의복, 종교 유물 등 방대한 종교 유물이 전시되어 이 종교의 어제와 오늘을 증언합니다. 단독 전시 공간만 54개에 달하지만 그 중 일부인 미술 컬렉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바티칸의 미술관인 피나코테카 바티카나에는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라바조, 조반니 벨리니, 티치아노 등 거장의 작품 46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유작인 <그리스도의 변용>, 다빈치의 <광야의 성 제롬> 등이 대표작입니다. 그리고 솔방울 조각 뒤편의 브라초 누오보에는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고대 로마 조각들이 도열해있구요. 이집트 박물관에서는 미라, 석관, 상형문자 비문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MBTI가 INTP인 저는 준비도 대책도 없는 성격인지라, 로마에 도착하기 불과 며칠전에야 티켓이 몇달치가 매진된 걸 알게 됐습니다. 입장할 방법은 패스트 트랙 티켓을 끊고 가이드 투어를 하는 방법 뿐이었죠. 덕분에 평생 해본 적이 없는 미술관 가이드 투어를 하게 됐습니다.
누군가에게 미술을 설명해주는게 직업인 저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십대 청년 가이드가 열성적으로 지름길과 미술 작품을 설명해주다 가끔 질문을 하면 밀당할 틈도 안주고 나도 모르게 정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예습을 열심히 해오셨나봐요?" 언더커버물을 찍고 있는 것도 아닌데, 머쓱한 답변이 나왔습니다. "아,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빠르고 지치지 않게 주요 공간을 훑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야할 작품은 벨베데레 정원에 숨어 있는 <라오콘 군상>입니다. 이 박물관을 탄생시킨 작품이죠. 1506년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인근 포도밭에서 이 조각상이 발굴됐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 조각상을 미켈란젤로에게 보게 했고, 이 완벽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 감탄해 이를 전시하기 위해 바티칸 박물관을 세우게 됩니다.
바다 뱀과 투쟁 중인 아들들, 뒤틀린 라오콘의 몸을 보며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기적'이라 표현했습니다. 지난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이미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복제품을 만났습니다. 오른팔의 각도를 기억하라고 말씀드렸죠. 발굴 당시 이 조각에는 라오콘의 오른팔이 없었습니다.
해부학에 정통했던 미켈란젤로는 오른팔이 활처럼 크게 휘어있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복원당시 오른팔은 피렌체의 복제품처럼 위로 밋밋하게 든 형태를 띄게됩니다. 훗날 오른팔이 실제로 발견됩니다. 놀랍게도 미켈란젤로의 예측대로 휜 모습이었죠. 오늘 우리가 보는 라오콘의 팔은 바로 그 모습입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과 재생을 꿈꿨습니다. 라오콘의 조각상은 15세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본질적으로 가닿고자 했던 원형인 셈입니다. 추상표현주의를 통해 20세기 미국 미술의 시대를 선언했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이 조각상에 주목했습니다. 미국의 새로운 예술가들을 상찬했던 전설적인 글에 <더 새로운 라오콘을 위하여>란 제목이 붙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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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 완벽한 비례의 작품을 인파속에서 각잡고 찍는건 불가능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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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투옥된 베드로 이야기를 그린 벽화.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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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라파엘로의 방에 도착했습니다. 사도궁전 2층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벽화가 있는 4개의 방이 있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집무실에 벽화를 그릴 화가 4명을 고용합니다. 각각의 벽에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그려넣어 자신의 집무실을 성스럽게 꾸미도록 한 것이죠.
그런데 라파엘로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나머지 화가들은 내쫓아버렸고 라파엘로는 열정을 갈아넣으며 독박을 쓰게 됐죠. 마지막에 들어서게 되는 '서명의 방'에 그려진 걸작이 그 유명한 <아테네 학당>입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시대가 회복하려했던 그리스 철학의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에 담깁니다. 플라톤과 아르키메데스의 손가락, 피타고라스의 책, 유클리드의 컴퍼스 같은 인물들의 상징이 숨어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 학당 속 54명의 인물은 정중앙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27명씩 배분됩니다. 완벽한 비례와 대칭, 수학적 계산이 원근법과 함께 구현됩니다. 당대에 과학과 철학과 미술은 한 몸이었습니다. 숨어있는 라파엘로의 검은 모자를 쓴 자화상에 인사를 건네고 이 방의 숨이 막하는 인파를 벗어났습니다. 인파 속에서 발을 땅에 두고서는 이 완벽한 비례를 사진에 담기가 요원했습니다.
마지막 방문지는 시스티나 채플입니다. 이 곳은 교황의 개인 기도를 위한 예배당이었습니다. 시스티나 채플은 15세기 후반에 건축을 의뢰한 교황 식스토 4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에서 1512년 사이에 천장 프레스코화를 그렸습니다. 세로 40.5m, 가로 14m의 거대한 천장을 홀로 채워넣은 겁니다. 30대 초반의 4년을 쏟아붓고 그는 시력이 나바졌고 평생 굽은 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제단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1536년에서 1541년 사이에 완성했습니다. 만년의 미켈란젤로는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천장화보다 상대적으로 작지만 여전히 거대한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완성한 것입니다. 늙고 병든 미켈란젤로의 만년의 대작에서는 자신을 비난한 추기경을 지옥불에 던져넣고, 가죽이 벗겨져 순교하는 바돌로메의 가죽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넣는 대담함도 보입니다.
벽화를 보는 순간 저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조각으로 이름난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마치 조각처럼 벽화 속 신과 인물들은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이 묘사법은 이후 바로크 미술을 탄생시킨 단초가 되기도 했죠. 벽화는 너무 거대했고, 멀리 있었지만 천장의 인물이 마치 살아서 눈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보였습니다. 그 어떤 그림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충격이었습니다. 고개를 들고 누운 자세로 4년간 매달려 그림을 그리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지 감탄하게 됩니다.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금하는 이 곳에서는 온갖 나라의 말이 뒤섞이는 소란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찰칵'소리가 없었습니다. 고요한 이 방에 홀로 있는다면, 그야말로 종교적인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생에 한 번은 꼭 경험을 해볼만한 만남이었습니다. 위대한 예술은 절대 사진으로 담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해야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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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불멸의 걸작, 시스티나 천장화. ⓒVatican Muse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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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채플의 <최후의 심판>, 1536~1541 ⓒVatican Museums |
성베드로 성당의 얼굴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만 전시되는 중. '복불복' 로마 여행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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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의 토르소>, 기원전 1세기.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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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 클레멘티노 갤러리 '뮤즈의 방'에 있는 숱한 걸작들보다도 더 눈에 들어온 작품은 <벨베데레의 토르소>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숨겨진 걸작으로 이 부서진 조각을 꼽곤 합니다. 서명이 새겨진 작가의 이름은 아테네인 네스토르의 아들 아폴로니오입니다. 하지만 이 완벽한 인체 조각을 이름없는 조각가가 만들었는지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고, 원본인지 복제품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조각의 정체는 수세기 동안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가설은 자살을 고민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이아스라는 추측입니다. 트로이 전쟁 중 아이아스는 아킬레스의 유품인 갑옷을 두고 겨룬 끝에 오디세우스에게 이를 빼앗기자 분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인물이죠.
15세기 말 고대 로마의 시장터에서 발견된 이 토르소는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됐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미켈란젤로입니다. 시스티나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 속 바돌로메 사도가 이 토르소와 같은 형태로 그려졌습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에서도 이 토르소의 형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도 허물이 있는 작품에 점점 더 눈길이 갑니다. 평생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서툰 생업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우리는 비범해지길 바랍니다. 내가 저 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 늘 의문을 품으면서 말이죠. 이름 없는 조각가가 뮤즈의 방에 입성하게 된 것처럼, 그 결말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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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저앤워스 <George Rouy: The Bleed, Part I>
- 12월 21일까지
영국은 구상화가의 전통이 유구합니다. 런던의 여러 갤러리에서는 매년 재능있는 구상화가들이 데뷔합니다. 1994년생으로 이 톱화랑에 입성한 조지 루이는 '출혈'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핏빛 캔버스를 전시합니다. 하나로 뒤엉켜 익명성이 극대화된 인물들은 작가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초상인가 봅니다. 마치 유령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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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는 석양과 야경이 더 아름답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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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겨울은 혹독합니다. 여름 같았던 로마 날씨가 그립네요. 다음주는 드디어 여행 이야기 (최종)(최최종)(최최최종)입니다. 곧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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