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카라바조의 작품 6점이 걸려있는 8전시실 실레누스의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12점의 카라바조를 소장해 카라바지스트(Caravaggist)를 위한 최고의 미술관으로 꼽힙니다. 60여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카라바조는 사후에 까마득히 잊혀졌다 20세기에 엄청난 인기화가로 300년만에 부활했습니다.
미국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렌슨이 쓴 글이 그를 "미켈란젤로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탈리아 화가는 없었습니다"라고 호명한 덕분입니다.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 작품의 발굴과 위작 시비도 연례 행사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1571년 태어났습니다.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뜻입니다. (실제 출생지는 밀라노였습니다.) 스승 시모네 페테르차노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으나 이후엔 흔적이 모호하다, 1600년 로마에서 혜성처럼 화가로 등장합니다. 전례없는 실력과 개성있는 표현력으로 극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카라바조는 거침없이 폭력을 묘사한 화가였습니다. 자신 또한 악당이었죠. 수차례 투옥됐던 법정 기록에는 요리를 두고 웨이터와 싸우고, 집주인을 괴롭히고, 자신을 거부한 여인에 폭력을 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술을 마시면 허다하게 시비가 붙었고 1606년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와 몰타, 나폴리, 시칠리아를 떠돌았죠. 1610년 살인죄로부터 사면받기 위해 교황이 있는 로마로 향하던 중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38년의 짧은 삶을 마감합니다.
가톨릭의 후원을 갈구했던 그는 종교화를 가장 많이 남겼습니다. 덕분의 맨발의 성자를 그린 화가가 됩니다. 더럽고 가난하고 평범한 서민들을 모델로 예수와 성자를 그렸습니다. 주름진 얼굴, 더러운 피부, 병자의 맨발을 그대로 묘사한겁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극심하던 당시 가톨릭에는 '작은형제회'를 설립해 맨발로 청빈한 삶을 살았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있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가톨릭 개혁을 지지하며 평범하고 남루한 사람들을 그렸던 겁니다. 그에게는 맨발이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천국이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전기를 쓴 피에트로 벨로리는 가식과 권위, 위선과 장식이 없는 그의 표현법을 ‘자연주의’라 설명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보죠. 보르게세 미술관에서는 20대 청년기 악마 같은 재능을 가리낌없이 발휘한 <과일 바구니를 든 청년>(1593)부터 <병든 바쿠스>, <성 제롬>, <성모자와 성 안나>, <세례 요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까지 연대기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적 묘사로 당대에 엄청난 비난을 받은 작품이 <성모자와 성안나>입니다. 성자 안나는 노파의 모습이고 성모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금기시 된 누드로 그려진 예수는 어떻구요. 그는 현실의 인물을 모델로 평범한 모습의 성자를 그렸습니다.
카라바조의 기법적인 특징은 극도의 명암 대비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입니다. 등장 인물을 단순화하고, 배경을 칠흙같은 검정으로 칠해 마치 연극 무대의 핀조명 같은 효과를 만듭니다. 이 기법이 극대화된 작품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입니다. 목이 잘린 늙은 골리앗은 비침한 도망자 신세가 된 그의 자화상이었습니다. 만년에 살인죄를 사면받기 위해 교황에 무릎 꿇었던 카라바조의 번민이 녹아있는 검디 검은 자화상입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에는 많은 가설이 있습니다. 사형 선고 직후 1606-7년 나폴리 시절 그렸다는 설과, 1609-10년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설입니다. 교황에게 사면을 청하기 위해 로마행 배를 탔을 때 이 작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연구로 인해 나온 설입니다. 현재로서는 그림의 기법상 1606-7년 설이 유력합니다.
게다가 다비드의 칼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를 통해 교황에게 선물하기 위한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라틴어 약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입니다.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