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런던의 왕궁에는 여행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관이 있습니다. 영국의 군주가 사는 곳은 버킹엄 팰리스입니다. 왕궁의 남쪽에 킹스 갤러리(The King's Gallery)가 있습니다. 말그대로 왕의 미술관이죠.
현지에 사는 분께 킹스 갤러리를 아는지 물어봤습니다. 퀸스 갤러리는 몇 년 전에 가본 적 있다고 하더군요. 작년 5월 무려 70년만의 대관식으로 왕이 취임하면서, 이름을 바꾼 겁니다. 이 곳에서 희귀한 르네상스 미술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무슨 영문인지, 르네상스 거장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17회 (2024.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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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한 버킹엄 팰리스. 믿기지 않지만, 오후 4시였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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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잿더미 위에 지어진 킹스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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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킹엄 팰리스는 언제나 인파로 번잡합니다. 근위병 교대식을 보려는 관광객으로 북적이죠. 그런데 정문에서 몇분만 더 걸으면 한적한 공공 미술관이 나옵니다. 퀸즈 갤러리는 엘리자베스 2세의 치하에서 1962년 시민들에게 개방됐습니다. 왕립 컬렉션의 예술 작품들을 순환적으로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이 갤러리는 궁전의 돌출된 남쪽 날개(South Wing)를 형성합니다. 처음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폭격당한 여왕의 예배당(Chaple)이었던 공간을 미술관으로 건립한 겁니다. 이후 37년 동안 500만 명의 방문객을 모으며 사랑을 받아오다 1999년에 리모델링 및 확장을 위해 문을 닫았습니다.
건축가 존 심슨이 리모델링해 2002년 5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의 황금 희년(A Golden Jubilee)에 맞춰 재개관했죠. 회화와 드로잉을 포함한 약 450점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연간 3회 정도의 기획 전시도 꾸준히 열고 있습니다. 왕실은 한스 홀바인, 렘브란트, 루벤스 등을 아우르는 회화를 비롯해 약 30만점의 대단한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이 곳을 거쳐간 수집왕들 덕분입니다.
17세기 영국에 최초의 수집왕(?)이 등장했습니다. 찰스 2세입니다. 1660년부터 1685년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었던 찰스 2세는 거장들의 드로잉을 수집한 최초의 영국 군주였습니다. 현재 왕실 컬렉션에는 약 2,000점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드로잉이 있는데 대부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수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궁정 화가였던 존 마이클 라이트가 헌신적으로 왕실을 위한 수집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찰스 2세 컬렉션의 핵심은 드로잉 수집가인 아룬델 백작 토마스 하워드가 완성했습니다. 그는 대륙 여행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많이 구매했고 약 200개의 드로잉 앨범을 소장했습니다.
이 앨범 중 하나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 555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16세기 조각가인 폼페오 레오니의 소장품이었습니다. 레오니는 다빈치의 그림 중 일부를 물려받은 제자 프란체스코 멜지의 가족으로부터 샀습니다. 그 앨범은 17세기에 영국으로 건너오게됩니다. 아룬델의 손자 헨리 하워드가 1670년경 찰스 2세에게 그림을 선물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다빈치의 그림들은 인물 연구, 식물학, 동물 연구, 해부학 연구 등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귀한 사료가 됩니다.
여왕은 오랫동안 왕실 소장품을 공개하는 전시에서 축사를 하며 이 공간에 애정을 보였습니다. 저는 영국에서 이러다 왕실 덕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 빠져 있습니다. 시즌3 1화는 퀸즈 갤러리를 이끌며 27년간 영국의 왕실미술수집품 조사관로 일한 앤서니 블런트가 스파이였다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왕실이 쉬쉬했던 이 사실을 훗날 마거릿 대처 총리가 폭로하면서 영국 사회가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죠.
작은 갤러리지만, 왕실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곳곳이 꾸며진 화려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숨겨진 이야기를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한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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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미켈란젤로가 친구에게 보낸 선물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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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꾸며진 갤러리 내부. ⓒThe Royal Collection Tru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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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The drapery of a kneeling figure> 1491–94 ⓒThe Royal Collection Trust |
레오나르도 다빈치 <A costume study for a masque>, 1517-18 ⓒThe Royal Collection Tru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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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르네상스를 다룬 두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습니다. 왕립 예술원에서는 11월부터 2월까지 기획전 <Michelangelo, Leonardo, Raphael>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를 다녀왔더니 딱히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더군요.
그런데 이 전시는 놓칠 수 없었습니다. 킹스 갤러리에서는 3대 거장의 드로잉 수십여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를 11월부터 3월까지 열고 있습니다. <Drawing the Italian Renaissance>는 1450년부터 1600년까지 이탈리아의 드로잉들을 탐구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80여 명의 예술가와 무명 화가의 작품 160여 점을 선보입니다. 모두 왕립 컬렉션의 소장품이죠.
르네상스는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고, 창의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피어난 시대였습니다. 드로잉은 예술 창작의 중심이었습니다. 발명과 건축의 아이디어도 드로잉을 통해 구현하려했죠. 공방 워크숍에서도 필수 과목이었던 드로잉은 곧 그 자체로 흥미로운 예술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 컬렉션을 소유한 곳이 영국 왕실입니다. 정말 수십여점의 드로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릎을 꿇은 여인의 옷을 그린 드로잉은 정말 감탄을 자아낼만큼 섬세했습니다.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드로잉은 그가 대형 유화를 그리기 전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과정을 엿보게 해줍니다. 호기심의 왕답게 인체 해부도를 그린 드로잉도 많았습니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지옥에서 온 동물처럼 보였던 고양이 드로잉도 있었습니다. (보도용 사진 촬영을 금지해 보여드릴 수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다빈치는 말년을 루아르 계곡의 프랑스 궁정에서 보냈습니다. 손은 느렸지만 다빈치는 정말 돈을 벌기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던 N잡러였습니다. 당시 프란치스코 1세가 개최하는 축제를 위해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죠. 왕의 재봉사들을 위한 드로잉이 남아 있어 그가 만들었던 의상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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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The Three Graces>, 1517–18 ⓒThe Royal Collection Trust |
Federico Barocci <The head of a Virgin>, 1582 ⓒThe Royal Collection Tru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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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동시대 화가들의 드로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페데리코 바로치의 <여인의 두상> 같은 드로잉은 그 자체로 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식물을 그리기도 하고 동물을 그리며 과학적인 연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의뢰받은 초상화, 인물화를 그리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전시장에는 완성된 작품과 드로잉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친절한 디스플레이를 해놓았습니다.
다빈치와 나란히 가장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작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입니다.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했고, 시스티나의 천정화를 의뢰받기 직전에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였지만 드로잉은 평생의 친구였을겁니다. 실제로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주기 위한 선물용 드로잉을 많이 그렸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32년 만난 젊은 로마 귀족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에게 처음으로 두 점의 그림을 선물했습니다. 티투스와 가니메데의 신화를 묘사한 드로잉입니다. 새해 선물로 보낸 이 그림을 받고 카발리에리는 매일 두 시간씩 그림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소중한 선물들을 카발리에리는 다른 이들도 볼 수 있게 판화로 제작하는 걸 허용했죠. 그 덕분에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드로잉은 바쿠스 축제를 그린 <A children's bacchanal>입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죽은 사슴을 가마솥으로 옮기느라 고군분투합니다. 아이를 씻기는 여인과 술에 취해 기절한 남자도 보입니다. 이성과 신성한 사랑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오로지 자연스러운 충동에 의해서 동물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그는 묘사했습니다. 드로잉 덕분에 우리는 500년이 지난 이후에도 미켈란젤로의 속내와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킹스 갤러리의 특징은 전시장마다 연필과 종이를 비치해 누구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교육 기능을 구비해놓은 점이었습니다. 저도 왕년의 솜씨를 발휘해 그림을 쓱쓱 그려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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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The Virgin and Child with the young Baptist>, 1532 ⓒThe Royal Collection Trust |
미켈란젤로 <A children's bacchanal>, 1533 ⓒThe Royal Collection 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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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ributed to Pietro Faccini <The head of a youth>, 1590 ⓒThe Royal Collection Trust |
인기 만점이었던 파르미지냐뇨의 개를 그린 드로잉을 보고 쓱쓱 그려봤다. 생각해보니 4B 연필을 놓은지 30년쯤 되긴했다.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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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무명화가의 드로잉. 1460-80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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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여점의 드로잉 중에서 저의 '원 픽'은 이 피렌체의 무명화가가 그린 드로잉이었습니다. 파란색 종이에 흰색 잉크로 그려진 이 그림의 제작 시기는 1460-80년대로 추정됩니다.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홀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거장들은 마치 오늘의 미술학교처럼 공방을 운영하며 조수를 고용해 일했습니다. 교회와 귀족들에게 다양한 주문을 받았고 제자들에게 작법을 가르치면서 작품 제작을 동시에 했습니다. 이 공방의 노동에는 남성들만 참여할 수 있었죠. 공방은 우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청년들의 땀과 시끄러운 말, 화구의 먼지로 가득한 곳이었겠죠.
드로잉은 작업장에서 일상적인 활동이었을 겁니다. 여기 한 청년이 몸을 구부리고 종이 위에서 몰두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구석에서 자고 있는 개처럼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빛과 그림자의 묘사가 탁월한 그림입니다. 무엇보다 잠에 푹빠진 개의 표정이 위안을 줍니다. 이 무명화가는 어떤 작가가 됐을지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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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oman 한국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
- 3월 8일까지 킹스턴 뮤지엄
영국의 한인 타운인 뉴몰든과 인접한 킹스턴 뮤지엄에서는 한국 여성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처음 방문한 로컬 뮤지엄은 신기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귀한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었고, 지역사 박물관 기능도 하고 있었죠. 4482라는 기획집단에서 기획한 전시는 베티 김, 엘런 워너, 강운열 등 10여명의 작가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영국 교포, 이민 2세대의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다를겁니다. 마이너리티로 타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업은 낯설고도 신선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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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도 새로운 런던의 전시를 만나봅니다. 곧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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