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연휴의 런던은 마트와 식당, 심지어 미술관까지도 죄다 문을 닫습니다. 가족을 위한 명절에 온 도시가 썰렁해졌습니다. 반짝이는 트리의 불빛만 남기고 말이죠.
런던에서 가을부터 열고 있는 전시를 막이 내리기 전에 부랴부랴 소개해봅니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지 않는 끔직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야기입니다.
10월 프리즈 위크의 전시 중 일부는 천천히 다루고 싶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개막 주간의 분주한 시기보다는 부지런한 팬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한가해진 시기에 전시를 보는 것을 훨씬 좋아하거든요.
18회 (202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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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광장은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북적인다. 런던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트리를 위해 핀란드의 나무가 공수됐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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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21세기의 뮤즈가 된 프랜시스 베이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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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의 프랜시스 베이컨을 피사체로 찍은 사진.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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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위크의 간판 전시 중 하나였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Francis Bacon: Human Presence>(2025년 1월 19일까지)는 이제 폐막을 3주 남겨두고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관광객이 아님을 누가봐도 알 수 있는 진지한 표정의 런던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인기리에 순항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21세기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작가는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국적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 작가들이 인간의 육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초상화와는 달리, 순수한 인간의 육체 자체를 말이죠. 이 모든 작가들의 원조는 프랜시스 베이컨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주는 폭력적인 묘사는 그야말로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줍니다. 그는 고기덩이처럼 해체된 육체를 거침없이 묘사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작품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많은 영향력을 주는 것은 우리의 21세기가 인간의 육체를 숭배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전시는 주제처럼 인간의 현존을 탐구합니다. 어둡고 음울한 '얼굴들'을 통해서 말이죠. 1940년대 이후에 그린 50여점의 그림을 통해 프란시스 베이컨이 초상화란 장르에 얼마나 혁명적으로 도전했는지 증언합니다. 자화상을 비롯해 친구였던 루시안 프로이트, 이사벨 로스트혼, 연인 피터 레이시와 조지 다이어, 존 에드워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떠나버린 연인, 친구들을 그린 초상화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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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일그러진, 내밀하고 친밀한 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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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 VI>, 1949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Homage to Van Gogh>, 1960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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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acon Self-Portrait>, 1973-73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Francis Bacon Self-Portrait>, 1987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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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으로 유명한 화가들은 많습니다.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를 비롯해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 데이비드 호크니가 떠오르네요. 20세기를 대표하는 자화상을 그린 작가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명성을 능가할 이가 없을 겁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의 부유한 집안에서 동성애를 저주하며 아들을 채찍질까지 했던 아버지의 핍박아래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자마자 베를린과 런던으로 차례로 떠나 자유와 사랑을 찾았죠.
런던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초반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초기 그의 작품에는 끔찍한 악평만 따라다닙니다. 비평가들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초기 그림을 대부분 파기해 1944년 이전 그림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1944)을 발표하면서 그는 화가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상징을 모두 녹아있는 고통에 절규하는 인간을 그린 걸작으로 훗날 평가받게 됩니다.
1. 벨라스케스와 반 고흐
"사진을 계속 찍었다. 정말 그것이 내 첫번째 주제였던 것 같다."
전시의 첫 번째 방에서는 베이컨에게 큰 영향을 준 두 거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초상화란 장르에 매료된 계기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이노첸시아 10세 초상>을 접한 것이었습니다. 1948년 엘라자베스 뒤 게 트라피에가 쓴 벨라스케스 전기에서 우연히 이 이미지를 만난 후 수십년에 걸쳐 이 도상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베이컨의 초기작에는 비명을 지르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을 묘사하는 방법을 탐구하면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권력자 교황조차 불안한 내면을 감출 수 없고, 감옥에 갇힌 것처럼 창살 속에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특징은 그의 초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베이컨은 로마에 갔을 때조차 실제로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이 있는 자유로운 표현을 방해받을까봐 이 그림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1960년에는 <반 고흐를 위한 오마주>를 그렸습니다. 베이컨은 반 고흐에 대한 관심으로 어둡고 단색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색채를 도입하는 선택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 재창조'하고자 했던 반 고흐의 열망은 '현실에 대한 더 깊은 감각'을 이미지로 표현하려한 베이컨의 야망과 공명했습니다.
2. 자화상
"나는 정말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정말로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파리처럼 죽어가고 있었고, 나 자신 외에는 그림을 그릴 사람이 없었다."
이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1987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찢어진 얼굴로 묘사된 1949년의 자화상에 비해 무척 온화해진 작품입니다. 베이컨의 평생의 탐구의 대상은 자신이었습니다.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전쟁 전후를 통과한 이후에도, 그는 모델을 쓰지 않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스튜디오에서 피사체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대신 사진과 기억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베이컨은 그림을 '왜곡'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고, 그림을 통해 가할 수 있는 '상처'로부터 피사체를 보호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렘브란트의 <베레모를 쓴 자화상>도 함께 전시됩니다. 베이컨은 렘브란트의 붓터치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평생 자화상을 즐겨 그렸고 50점 이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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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Studies of Isabel Rawsthorne>, 1967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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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친구와 연인들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을 그릴 수 없었다. 그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외형을 보고, 그들의 행동을 보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리는 시도는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친구와 연인들의 초상화입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베이컨은 비명을 지르는 인물과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서 그림의 소재를 얻기로 결정합니다. 후원자인 로버트와 리사 세인즈버리, 그리고 동료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1969년작 삼면화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가지 연구(Three Studies of Lucian Freud)>는 2013년 11월 12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240만 달러에 낙찰되어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을 세운 작품입니다. 베이컨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죠.
그의 연인 피터 레이시, 조지 다이어, 존 에드워즈, 친구 헨리에타 모라에스, 콜로니 클럽의 창립자 뮤리엘 벨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인 루시안 프로이트와 이사벨 로스트혼 등 가장 친구들을 그린 초상화는 그의 가장 친밀하고 내밀한 그림입니다. 여자의 초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던 베이컨이 19점의 초상을 그린 인물이 이사벨이었습니다.
피터 레이시가 죽은 지 약 2년 후, 런던 빈민가 출신의 좀도둑 조지 다이어를 만나게 됩니다. 만난 첫 날, 훔친 롤렉스 시계를 선물했다고 알려진 잘 생기고 질투심이 많은 남자였죠. 육체적 폭력과 갈등을 겪은 관계였지만 베이컨은 그의 초상화를 가장 많이 그렸습니다. 다이어는 결국 베이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절망해 파리의 호텔에서 변기에 앉은 채로 자살합니다.
베이컨은 1년이 지난 1973년 자신의 생각을 지배했던 다이어의 죽음을 삼면화로 그립니다. 다이어의 참혹한 모습은 그의 슬픔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연인을 잃고 비탄에 빠져 그린 어둡고 슬픈 삼면화로 전시가 막을 내리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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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마지막 작품인 잃어버린 연인을 추모하는 삼면화 <Triptych in Memory of George Dyer>, 1973. ⓒThe Royal Collection Tru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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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91-92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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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가 아니었으면 만나기 힘든 작품이 있었습니다. 전시의 동선 끝자락에 위치한 그의 생애 말기에 그린 유작입니다. 이 작품은 사후에 그의 스튜디오 이젤에 미완성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베이컨은 투병을 하던 80대에도 대형 캔버스와 사투하고 있었습니다. 자화상이란 이름이 붙은 이 그림이 실제로 누구를 그렸는지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인물의 형태만으로는 베이컨 만큼이나 베이컨이 그렸던 남성 중 일부와도 닮아있다는 분석이 있죠. 그의 많은 다른 그림들처럼, 어쩌면 그의 남성 모델들의 모습을 혼합해 만든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베이컨은 성공을 거듭했으나, 외로움에 늘 시달렸습니다. 연인들은 모두 죽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죠. 오래 전에 절교했던 연인과도 화해하려 했지만, 그의 마지막 시도는 늘 실패했습니다. 신장 제거 수술을 받은 뒤 쇠약해진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그의 손이 그리고자 했던 건 누구였을까요.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일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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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가 첩보 스릴러 <블랙 도브>인걸 보며 참 영국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장 결혼을 한 스파이 키이라 나이틀리가 킬러 벤 휘쇼와 함께 보스인 전직 '닥터 후' 사라 랭커셔의 지휘를 받는 이야기였습니다. 차이나 타운, 코벤트 가든, 사우스 뱅크 등 런던의 명소가 골고루 나와 반가웠죠. 아무리 그래도 연말인데, 이렇게 피와 살점이 튀는 시리즈를 좋아하는게 신기했습니다. 영국의 인기 TV쇼는 한국과는 정반대로 죄다 범죄 스릴러입니다. 우울한 겨울 날씨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디가 크리스마스와 연관이 있나 싶었는데, 결말은 크리스마스를 맞은 화목한 가정을 비추며 끝나더군요. 아이가 받고 환호하는 선물은 토트넘의 캡틴 등번호 7번이 새겨진 유니폼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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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부터는 슬프게도 한 살 더 나이를 먹네요.
새해에도 열심히 돌아다녀 보겠습니다. 곧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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