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들이 프라하에서 단 한 곳의 미술관을 찾는다면 무역 박람회 궁전이 최선입니다. 블타바강 북쪽에 자리잡은 오피스 빌딩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현대식 건물은 과거 화재가 난 무역 박람회 건물을 재건하면서 미술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체코의 근대미술관과 동시대 미술관은 물론이고 조각, 건축, 디자인미술관을 한 곳에 모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간입니다.
채광이 좋은 널찍한 공간을 사용하고 음식과 맥주도 맛이 있는 미술관 카페는 힙스터들이 가득했습니다. 건물의 유래대로 박람회를 찾은 것처럼 많은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어, 반나절을 꼬박 돌아도 시간이 부족할 만큼 넓은 미술관이었습니다.
체코의 미술은 이름을 아는 작가가 거의 없어서 낯설었습니다. 그럼에도 빈에서 만났던 동유럽 특유의 특징이 녹아 있는 화풍은 익숙한 면도 있었습니다. 빈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대표작을 여러점 소유하고 있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반 고흐, 르누아르 등 인상파 작품을 비롯한 19세기말 유럽 걸작을 방대한 분량을 소장하고 있었는데요. 그 비결은 1923년 체코 슬로바키아 정부가 프랑스 미술 컬렉션을 대거 구입한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꼭대기층에서 근대 미술 컬렉션부터 만났습니다. <1796–1918: Art of the Long Century>를 주제로 열리는 상설전시는 150명의 450점에 달하는 작품을 전시하는 거대한 전시입니다. 미술관은 "체코와 국제 예술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는 목적으로 파블로 피카소 옆의 요제프 만스(Josef Mánes), 보후밀 쿠비슈타(Bohumil Kubišta) 옆의 요제프 나브라틸 (Josef Navrátil), 프란츠 폰 슈턱(Franz von Stuck) 옆의 안토니오 카노바 (Antonio Canova)와 같이 체코와 유럽의 예술가를 나란히 소개하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자화상, 인물화, 활기찬 도시 풍경화, 종교와 신화 주제의 예술까지 다채로운 주제를 넘나듭니다. 체코의 근대를 눈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정말 즐거운 전시였습니다. 프라하성과 카를교를 그린 풍경화부터, 산업화가 시작되는 도시의 면면을 만나는 그림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를 거친 국가들은 사실주의 회화의 전통이 탁월했었다는 걸 매번 느끼곤 합니다. 루덱 마놀드(Luděk Marold)의 <프라하의 달걀 시장(The Egg Market in Prague)>(1888)은 19세기 말 프라하의 장터가 눈에 잡힐 듯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시 당시 이 그림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립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19세기 말의 또 다른 사실주의 회화 야쿱 쉬카네더(Jakub Schikaneder)의 <집안의 살인(Murder in the House)>(1890)이었습니다. 시카네더는 '비극의 장인'입니다. 어린 소녀들의 비극적인 삶을 여러차례 변주해 그렸습니다. 존 에버렛 밀레의 <오필리아>의 영향을 받았죠.
산업화의 물결이 휩쓸고 간 도시는 하층민에게 빈곤과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림 속에서 돌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소녀를 보며 이웃들은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높이 2미터, 길이 3미터가 넘는 이 대작을 통해 화가는 가장 낮은 계층의 이야기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낸 겁니다.
쉬카네더는 사후에 작품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체코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습니다. 1998년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가 화제를 모으면서 재발견됐죠. 2021년 런던 소더비에서 판매된 <프라하의 겨울(Winter in Prague)>은 그의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로 그려진 프라하의 풍경화로, 58만달러의 기록적인 가격에 낙찰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1세기에 뒤늦게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 셈입니다.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Amorpha: Fugue in Two Colours>는 이 미술관의 간판 작품입니다. 딸이 가지고 노는 공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두 가지 색상으로 추상적인 움직임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바흐의 음악 푸가(fugue)가 그림을 통해 마법처럼 표현된 오르피즘의 대표작품입니다. 1912년 파리의 가을 살롱에서 대중에게 공개 된 최초의 추상 회화로 기록된 작품이기도 하죠.
체코에는 요제프 만네스(Josef Mánes), 베네시 크뉘퍼(Beneš Knüpfer), 막스 슈바빈스키(Max Švabinský) 등 정말 재능이 넘치는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비롯해, 신화적 상상력을 영국의 라파엘전파보다도 더 화려한 장식적인 표현으로 그렸던 막스 피르너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근대 미술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Virgin>(1913)이었습니다. 꿈꾸는 처녀의 생의 주기를 상징하는 여섯 여인이 한 송이 꽃다발처럼 얽혀 있는 관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전후 미술을 전시하는 층에서는 공산국가 시절의 프로파간다 미술부터 '프라하의 봄' 이후에 만개한 현대 미술로의 전환기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체코 미술사에서는 초현실주의와 사실주의가 대결했고, 서정적 추상화가 구성주의와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개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퍼포먼스, 설치 등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체코를 대표하는 동시대 작가의 특별전도 계절마다 부지런히 열고 있는 미술관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