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동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독일 드레스덴입니다. 저에게는 W.G.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이 묘사했던 무자비한 융단폭격으로 각인된 도시입니다. 폐허 위에서 도시는 완전히 새롭게 재건되어 있었습니다. 온통 검게 그을린 왕궁과 미술관조차 불과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놀라웠고, '독일의 피렌체', '엘베강의 보석'이라는 별명처럼 작고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37회 (2025. 5.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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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그을린 건물들이 인상적인 드레스덴. 오른쪽 건물이 드레스덴 왕궁이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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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엘베강의 보석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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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현대미술관 알버티눔 우측의 모습. 공원에는 설치된 마렉 솝치크의 직사각형 무지개 형태의 문 조각, <예술가의 예우>. 미술관의 포용성을 상징하며 2024년 설치됐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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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와 뮤지엄샵, 티켓 부스가 있는 실내 공간이 엄청난 개방감을 자랑한다. 설치작품 같은 휴식 공간이 있다. ©김슬기 |
- 미술관 1층 클링거살에는 동시대 작가의 회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케힌데 와일리의 <General John Burgoyne>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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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국립 박물관은(The 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 SKD)은 무려 15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된 거대한 박물관 단지입니다. 이 도시의 크고 작은 박물관 중에는 드레스덴 왕궁의 '녹색 금고(Grünes Gewölbe)'처럼 왕실의 온갖 진귀한 보물을 모은 곳도 있고, 무기, 도자기 등을 전시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 도시의 박물관들은 재미없고 고지식한 나라라는 독일에 관한 편견을 깰 정도로 정말 화려한 작센 왕국의 왕실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SKD 컬렉션의 기틀이 마련된 건 4세기 전이었습니다.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왕인 아우구스트 스트롱(1670~1733)이 프랑스 베르사유를 여행한 후, 태양왕의 화려한 궁전을 재현하려는 욕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츠빙거 궁전의 건립을 시작했고, 자신의 거주지에 녹색 금고, 조각 컬렉션(Skulpturensammlung), 판화 및 드로잉 캐비닛(Kupferstich-Kabinett)를 설립하고 도자기와 귀중한 물건을 열정적으로 수집했습니다.
드레스덴 미술여행은 독일의 베르사유라고 할 수 있는 츠빙거 궁전(Zwinger)과 알버티눔(Albertinum), 두 공간이 핵심입니다. 1891년 고고학자 게오르그 트레우(Georg Treu)는 SKD 컬렉션의 정수를 품게 되는 알버티눔의 개관을 이끌었고, 고대 조각품과 석고상을 이 곳에서 전시하게 됩니다.
현재 SKD에서 가장 거대한 공간을 차지한 현대미술관이 된 알버티눔은 2002년 드레스덴의 대홍수로 피해를 입은 뒤, 2006~2010년 보수 공사를 거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르네상스풍의 웅장한 19세기 건물에 자리한 이 미술관에는 고대 조각과 함께 현대미술이 전시되어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됐습니다.
1층 클링거살(Klingersaal)에서는 고대 조각과 함께 케힌데 와일리 등 생존 작가의 회화가 나란히 걸려 있어 동시대와 호흡을 하려는 시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과 막스 클링거(Max Klinger), 프란츠 폰 슈턱(Franz von Stuck), 사샤 슈나이더(Sascha Schneider) 등 독일을 대표하는 이들이 조각상과 함께 설치되어 있습니다. 독일 미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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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par David Friedrich <Das Große Gehege bei Dresden>, 1832 ©Albertin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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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리히터의 <9 Stehende Scheiben (879-3)>, 2002 ©Albertinum |
자연의 숭고함을 그린 프리드리히를 연상시켰던 게르하르트 리히터 <Davos (468-1)>, 1981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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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부터 18세기까지의 미술을 주축으로 하는 츠빙거와 달리 알버티눔에서는 낭만주의 화가들의 1800년대 걸작과 20세기 미술 및 현대 작품이 핵심입니다. 칼 구스타프 카루스(Carl Gustav Carus), 요한 크리스티안 달(Johan Christian Dahl), 루드비히 리히터(Ludwig Richter)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어 클로드 모네와 막스 리버만과 같은 프랑스와 독일의 인상파 화가도 만날 수 있습니다.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표현주의 그룹과 교감하며, 미술사의 흐름을 조감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특히 이곳에서는 작년 탄생 250주년 전시(올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건너간 전시)를 대대적으로 했던 미술관답게, 국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840)의 주요 작품 10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1798년 코펜하겐에서 드레스덴으로 이주해 남은 생애를 이 곳에서 살았습니다. 작년 알버티눔의 특별전 주제도 드레스덴이 거장에게 의미하는 바를 담은 <모든 곳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알버티눔의 대표작 <The Grosse Gehege near Dresden>(1832)은 프리드리히가 만년인 57세에 그린 풍경화입니다. 철학자 테오도르 W. 아도르노가 최초의 현대 회화라고 묘사하고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가 우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로 식별하는 데 사용한 의미있는 작품입니다.
드레스덴 북서쪽 엘베강 유역 범람원(The Great Enclosure)의 늦여름 일몰을 묘사하고 있죠. 물웅덩이와 하늘이 교차하고, 그림 속 인간의 흔적은 작은 배 뿐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섬세한 묘사로 광활한 대지에 빛이 스며드는 초현실적인 순간을 그렸습니다. 화가에게 신과 다름 없었던 자연의 정신성을 드러내고 있죠. 미술사학자 베르너 부쉬(Werner Busch)는 이 작품을 가리켜 "프리드리히의 후기 작품 중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제가 유럽에 있는 동안 영국과 독일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재평가를 하고 있는 화가들이 산업혁명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이라는 점입니다. 반물질주의, 풍경화 등을 접점으로 하고 자연을 숭고하게 묘사했던 프리드리히, J.M.W.터너와 존 컨스터블이 차례로 250주년을 맞고, 유럽이 이들의 예술에 공감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해보입니다. 극도로 혼란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반작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설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드레스덴 태생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의 <전쟁 삼부작>(1929~1932)도 놓치면 안됩니다. 딕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4년 동안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참혹한 시체가 늘어선 참호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삼면화라는 제목과 달리, 하단부에 덧붙여진 네 번째 패널에는 땅속에 매장당한 시체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전쟁을 이상화하던 시기에 그려진 의미있는 작품입니다. 이 저항의 예술을 통해 딕스는 거짓 영웅주의를 폭로한 셈입니다.
드레스덴이 낳은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위한 두 개의 방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회화 컬렉션의 대미를 장식하며 동선의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분단된 동독을 떠나 서독에서 화가로 만개한 예술가는 아름다운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에서 당시 체제 선전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배웠습니다. 훗날 그가 기존의 체제와 관습을 거부하고, 전복의 예술을 하게 된 것은 동독을 떠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드리안 이모를 그린 사진 회화를 비롯해 다양한 시기에 그린 추상화 등 대표작을 두루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는 9장의 투명한 유리를 겹겹이 설치 놓은 작품 <9 Stehende Scheiben (879-3)>이 있었습니다. 빛의 반사 및 중첩으로 나타나는 '가상의 이미지'를 그는 전시한 것입니다. 유리는 개인과 현실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예술의 핵심적인 장치인 '흐릿함, 불확실성, 덧없음, 편파성'을 드러내는 매개가 됩니다.
리히터가 그린 알프스 산맥 위의 해를 그린 흐릿한 풍경화 <Davos (468-1)>에서는 프리드리히의 풍경화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드레스덴은 위대한 화가들을 거듭 배출한 놀라운 도시입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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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Dix <War Triptych>, 1929-1932 ©Albertin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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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전쟁에서 살아남은 라파엘로의 마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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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베르사유 궁전이라고 할 수 있는 츠빙거 궁전의 동쪽은 회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츠빙거의 안뜰은 공사중이어서 아쉬움이 있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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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fael <Die Sixtinische Madonna>, 1512/1513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
Adloph von Menzel <"Platz für den großen Raffael!">, 1855/59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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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거 궁전은 드레스덴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울타리 대신 정방형의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물을 사방으로 건축해 외부와의 경계를 만든 이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궁전은 1722년 아우구스투스 2세가 건립해 지금은 예술품과 온갖 진귀한 수집품을 전시하는 곳이 됐습니다.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3세는 회화 갤러리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1855년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가 설계한 회화 갤러리 건물은 18세기 중반에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회화 갤러리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게 됐죠.
1945년 2월 13일과 14일에 있었던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은 츠빙거 궁전도 초토화시켰습니다. 1950~60년대 독일은 세심하게 폐허가 된 궁전을 복원했고, 놀랍게도 세월의 흔적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 그을린 궁전의 외관으로 관람객을 맞고 있습니다. 현재 츠빙거의 동쪽 건물은 고전 회화 갤러리(Gemäldegalerie Alte Meister)로 이용되며, 방대한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 만큼이나, 건물의 내외부가 화려해 독일에선 정말 보기드문 볼거리였습니다. 파올로 베로네세, 티치아노, 얀 반 에이크, 루벤스, 렘브란트 등 시대를 넘나드는 걸작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 미술관에는 정말로 드라마 같은 생애를 보낸 걸작이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마돈나(Die Sixtinische Madonna)>(1512/1513)는 화려하게 장식된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성모화 중 하나로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이죠. 피아첸차(밀라노 남동쪽)에 있는 산 시스토 수도원의 제단을 위해 그려졌고, 1754년, 2년간의 힘겨운 협상 끝에 드레스덴에 오게된 작품입니다.
재미있게도 전시를 위해 왕이 왕좌를 옮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1754년 드레스덴으로 인수되어 그림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순간을 궁정화가 아돌프 멘첼은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림 제목은 "위대한 라파엘로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라!"라는 아우쿠스트의 전설적인 말을 기록한거죠.
이 걸작은 성 식스투스와 성 바바라와 함께 구름 위에 선 성모와 아기 예수를 묘사합니다. 마지막 과정에 라파엘로는 아래 난간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두 명의 작은 천사를 그려넣었습니다. 관객의 시선을 그림 속으로 이끄는 귀여운 천사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르네상스 걸작은 독일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많은 관람객은 '스탕달 신드롬'에 빠졌고,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아이콘이 되어 괴테, 바그너, 니체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은 "라파엘로의 드레스덴 시스티나 마돈나는 독일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고, 예술과 종교에 대한 논쟁에서 독일인들을 통합하거나 분열시켰다"라고 책에 쓰기도 했죠.
널리 퍼진 전설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폭격에서 이 그림은 소련군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는 이 그림을 모스크바로 가지고 갔죠. 그림의 보존 상태를 두고 논란을 낳은 끝에, 1956년 마침내 그림은 독일로 귀환해 미술관에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됩니다. 복원을 거쳐 지금은 드레스덴의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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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거 고전 회화 갤러리 내부 모습.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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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Holbein <Charles de Solier>, 1534/35 ©김슬기 |
Liotard, Jean-Étienne <Liotard, Jean-Étienne>, 1744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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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연이 있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Charles de Solier>(1534/5)는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영국 주재 대사인 솔리에의 초상화입니다. 근엄한 표정과 과시적인 호화로운 옷과 보석으로 가득한 이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오해를 한 구매자가 사들였다고 합니다.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상화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1881년에야 미술사학자들은 이 초상화가 홀바인의 작품이고 그 인물이 프랑스 외교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 에티엔 리오타르의 <초콜릿 소녀>는 날이 갈수록 더 유명해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1744년 비엔나에서 그려진 이 하녀의 이미지는 리오타르의 가장 유명한 파스텔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가 실존 인물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핫초코를 제공하는 응접실 하녀를 묘사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재료가 파스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놀라운 표현력입니다. 물컵 속에 반사된 오른손의 모습 등은 감탄이 나옵니다. 당대에는 모델의 낮은 사회적 지위, 세밀한 인물 묘사 및 사실적 표현 등은 당시의 파스텔화와는 모든 면에서 남다른 작품이었죠.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초콜릿 소녀'라고 불리게 된 이 작품은 달콤한 초콜렛이 각광받는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전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징적인 그림이 되었습니다.
이 곳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2점이나 가진 드문 미술관입니다. <중매인>(1656)은 카라바조의 영향으로 휴먼 스케일의 인물 4명을 그린 보기 드문 큰 작품입니다. 쾌활한 표정의 중매 장면을 그린 작품의 왼쪽에 있는 정면을 본 남자는 베르메르의 자화상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지목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그림 이후 베르메르의 그림은 크기가 작아지고, 사연이 더 내밀해졌습니다. 여인들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그리게 되기까지, 그에게는 어떤 큰 변화가 찾아왔던 것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네덜란드를 방문하기 전까지 제가 만났던 가장 완벽한 베르메르의 작품이 <열린 창문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녀>(1657–1659)였습니다. 창문을 통해 실내로는 빛이 스며들고 캔버스의 가운데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어린 소녀가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여인과 실내 장식, 벽에 걸린 회화 등 구성의 비례가 완벽해 보입니다. 그런데 비밀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오른쪽 큐피드가 그려진 '그림 속 그림'은 다른 사람에 의해 덧칠되어 숨겨져 있던 작품입니다. 후대에 과학적 연구를 통해 작가의 사후에 덧칠이 되었음이 드러났죠.
미술관은 큐피드의 묘사를 복원해냈고, 그림 속 여인의 이야기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손에 들린 편지 속에는 어린 연인의 사랑의 사연이 적혀 있을 겁니다. 과거의 관람객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진 겁니다. 그림을 복원하는 일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알려준 생생한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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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Vermeer <Bei der Kupplerin>, 1657–1656 ©김슬기 |
Johannes Vermeer <Brieflesendes Mädchen am offenen Fenster>, 1657–1659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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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rian Ghenie, Degenerate Art, 2014 ©Kupferstich-Kabinett |
<Battleground> 전시 전경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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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 만난 지 불과 며칠만에 아드리안 게니의 두 번째 전시도 드레스덴에 만났습니다. 드레스덴 왕궁(Residenzschloss)에 있는 쿠퍼스티치-카비넷(Kupferstich-Kabinett)에서 만났습니다. 왕실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이 곳에서 열리는 특별전시 <Battleground>는 종이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했습니다.
게니는 20세기를 '굴욕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루마니아 독재 치하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에게 지난 세기는 과잉 이데올로기로 인한 파국으로 가득한 시대였죠. 그를 유명하게 만든 출세작 중 하나는 미술사에서 모티브를 따온 반 고흐의 초상입니다.
두터운 붓터치로 재해석은 반 고흐의 초상화를 한국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그 이전에 그는 사진을 잘라서 콜라주로 이 작업을 변주하는 과정을 거쳤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전시의 대부분이 콜라주 작업이어서 놀랐고, 그의 작업이 어떤 변화를 거쳐 현재로 도달할 수 있었는지 덕분에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전혀 비극적이지 않은 사진들은 콜라주를 통해 반 고흐, 다윈, 헤르만 괴링 등의 기형적이고 위협적인 초상으로 재탄생합니다. 독재와 전쟁은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만들어내고,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꾸준히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목탄 드로잉 작품에서는 디지털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자유롭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습작들이 빈 전시에서 만난 거대한 작업의 기초가 되었을 겁니다. 그는 과거부터 천착해온 자신의 주제를 꾸준히 현재로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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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 할아버지가 공부했던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학교가 아닐까 싶었다. 졸업생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미 현역으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작가들의 전시 수준도 높았고, 무엇보다 사진 속에서 푸른색으로 빛나는 돔 아래에 있는 전시 공간이 압권이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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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금요일 밤, 내셔널 갤러리에는 단 한 명을 위해 마련된 침실이 만들어집니다. 다음날 일반에 공개되는 세인즈버리윙의 재오픈을 기념하며 하루 전날 열리는 이벤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걸작들과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한 한명을 뽑는 재미있는 추첨 행사가 열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참여자가 몰렸을지 궁금하네요. 저도 응모는 해봤지만, 낙방을 한 것 같습니다. 세인즈버리윙의 재개장은 프레스 프리뷰만 이틀에 걸쳐서 하는 미술관의 대규모 이벤트로 기획되고 있습니다. 런던을 잠시 떠나는 관계로 저는 10일에 일반 입장을 해볼 계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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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왔으니 부지런히 떠납니다. 저는 파리에 왔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데이비드 호크니, 퐁피두센터의 마지막을 보러왔습니다.
런던으로 돌아가면 곧장 내셔널갤러리의 리뉴얼 전시가 기다립니다.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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