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익스 뮤지엄의 0층부터 중세 시대로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종교화와 희귀한 컬렉션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범선 모형과 동양의 도자기와 불상, 수세기 전 도서관까지도 고스란히 전시하고 있는 이 미술관은 대항해시대의 배를 통해 들여온 온갖 희귀한 보물들이 보관된 금고처럼 보였습니다.
라익스 뮤지엄을 관람하는 게 즐거웠던 이유가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미술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게해준다는 점입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미술의 계급도에서 역사화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진 초상화와 정물화가 특별히 발전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사진보다도 더 사실에 가까운 세밀한 표현으로 그린 그림을 부유한 상인들은 사모았습니다. 플랑드르의 풍경, 화려한 화병의 그림을 집에 걸어두며, 미술을 소장하는 기쁨을 누렸던 겁니다. 이런 부유한 제국에서 위대한 화가가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의 독특한 수집 습관은 작품의 면면에서 묻어납니다. 조지 헨드릭 브라이트너(George Hendrik Breitner)는 1893년에서 1896년 사이에 브라이트너는 일본 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코모노를 입은 소녀의 그림 13점을 그렸습니다. <흰색 기모노를 입은 소녀>(1894)는 16살의 하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당대 사람들이 소녀의 몽상적인 시선과 안타까운 현실은 당시 관람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합니다.
이 미술관의 가장 이국적인 풍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로렌스 알마-타데마의 <이집트 과부>도 있습니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벨기에와 영국에서 활동했고,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이집트와 로마의 과거에 대한 묘사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작위까지 받은 화가였죠. 이 그림 속 고고학적 디테일로 가득한 묘사는 놀랍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인의 옆에서 사제들은 슬픔의 애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1900년까지의 미술을 주요 컬렉션으로 삼고 있는 미술관의 마지막 화가는 반 고흐입니다. 이웃에 위치한 반 고흐 미술관이 대표작을 대거 소장하고 있지만, 풍경화 몇 점과 자화상을 라익스 뮤지엄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1887년 파리시절의 자신을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파리지앵으로 묘사한 희귀한 작품입니다.
라익스 뮤지엄의 가장 독특한 점은 2층 정중앙에 명예의 전당(Gallery of Honour)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미술관이 낯선 관광객들에게는 '유명한 그림'만 단숨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곳만 평소에 붐비는 편이라서, 미술 애호가들은 다른 전시실을 상대적으로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와 <유다의 신부>, 주디스 레이스터 <세레나데> 등을 포함한 20여점의 미술관 대표작들이 이 곳에 모여있습니다. 명예의 전당의 가장 혼잡한 장소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 4점이 나란히 걸려 있는 곳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베르메르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다운 인기를 자랑합니다.
메르메르 순례자의 성지답게 2023년에는 세기의 전시를 열어, 28점의 작품을 이 곳에 모으기도 했었죠. 이 전시를 보지 못해서, 저는 힘들게 온 유럽을 돌며 하나씩 도장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사 바로가기
델프트의 풍경을 그린 <리틀 스트리트>(1658)는 작은 그림 속 풍경과 인물의 구도가 정말 균형잡혀 보였습니다. 운하변에 위치한 전통 주택의 실내에는 일하는 여인들이 보입니다. 베르메르의 이모가 실제로 살았던 집을 오른쪽에 그린 겁니다. 그림 속 장소인 델프트의 Vlamingstraat 40-42는 지금은 옛 모습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순례자들이 찾아가는 곳이 됐습니다.
<편지 읽는 여인>(1663)은 드레스덴에서 본 그림과 쌍둥이처럼 닮은 그림이었습니다. <러브 레터>(1669 -1670)는 주인공이 있는 실내를 멀리서 포착해 원경에 담은 구도가 독특하죠. 편지를 건네준 하녀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이 멜로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벽에 걸린 바다 풍경처럼 17세기에 바다는 종종 사랑에 비유되었고, 연인은 배에 비유되었다고 합니다.
베르메르의 걸작 <밀크 메이드>(1660)는 정말 작은 크기의 작품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멈춰 있고 우유만 흘러내리는 순간이 묘사됩니다. 일에 완전히 몰두한 하녀는 밝게 빛나는 조각상처럼 서 있습니다. 그녀의 몸에 빛에 쏟아지고, 그림은 마치 햇살 속에 있는 것처럼 반짝입니다.
이토록 작은 그림에 놀라울만큼 많은 세부 묘사가 숨어 있습니다. 바닥에는 추운 겨울을 견디게하는 난로가 놓여있고, 오른쪽 하단에는 타일 속에 큐피트가 그려져 있습니다. 빵바구니 가득 빵이 있고, 심지어 벽에는 움푹 팬 흔적과 못자국도 그려졌습니다.
베르메르는 이처럼 12명의 아이를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었으면서도 부엌의 작은 구석, 소녀의 방 한 켠으로 자신의 시선을 가져가는 미스터리한 화가였습니다. 마치 영화 감독처럼 단순한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순간을 포착하죠.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이야기로 기억하게 만드는 마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