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셨나요? 이번 주도 여행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변화무쌍한 영국 날씨를 가장 극적으로 체감한 건 스코틀랜드에서였습니다. 전생에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정도의 공을 세워야 볼 수 있다는 구름 한 점 없는 하이랜드를 운좋게 만났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글래스고에 가니 비와 먹구름,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도시에서 낯설고 신기한 스코틀랜드의 미술도 만났습니다. 보람 있는 여행이었죠. 특히 미술관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미술관 이야기를 2주 동안 해볼 생각입니다.
4회 (2024.0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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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이토록 근사한 미술관의 차경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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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본관과 차경을 볼 수 있게 증축된 지하층의 전경. 지하층을 통해 본관과 왕립 스코틀랜드 아카데미가 연결되어 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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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미술관의 건축구조.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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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창에서는 월터 스콧탑과 시청이 보이는 에딘버러 최고의 뷰가 펼쳐진다. ⓒ김슬기 |
아기자기한 디스플레이가 인상적이고. 아트숍이 전시장 내부에도 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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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National)은 3단 합체 로봇같은 구조를 가졌습니다. 이 미술관은 지상에는 광장이 이어져있고, 지하층의 앞마당은 공원을 품고 있습니다. 왼쪽으로는 미술관 본관, 오른쪽으로는 아카데미 건물이 있죠. 두 건물을 연결하며 증축된 지하층은 현대식으로 통유리로 만든 창이 있어 에딘버러 최고의 차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게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뷰인가 싶은 호사스러운 풍경입니다.
1859년 문을 연 이 미술관은 스코틀랜드 최고의 컬렉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 미술관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소장품은 1300년부터 1945년까지의 스코틀랜드 미술이 주를 이루고 베르메르, 티티안,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인상파 등도 다양하게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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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베르메르가 스코틀랜드 여행을 떠난 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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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선 눈에 띄는 몇몇 작품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얀윈더의 성모>(1501)는 영국에 몇 점 없는 다빈치의 그림입니다. 다빈치가 후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의뢰인이 플로리몽 로베르테임을 알 수 있죠. 마감을 못지키기로 악명이 높았던 만큼, 이 그림이 의뢰인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인물과 전경의 암석은 다빈치의 손에 그려졌을 것이지만, 후경은 다른 예술가가 완성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소장자인 버클루흐 공작은 자신의 성에서 2003년 이 그림을 도난 당했다 2007년 가까스로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여를 통해 시민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소장품 중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계란 요리를 하는 노파>(1618)가 독특했습니다.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그린 이 작품은 원숙기의 대작들과 비교하면 벨라스케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화풍을 보여줍니다. 왕실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기 이전, 고향 세비야에서 그는 일상적인 그림들을 그리곤 했습니다. 흑백의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카라바조를 연상케할 정도입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하류층을 다룬 악당이 등장하는 피카레스크 문학이 유행했습니다. 피카레스크 문학의 삽화라고 해도 어울릴 이 그림은 노파와 소년, 음식들을 보면 당대의 넉넉치 않았던 하류층의 음식문화를 알게 해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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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얀윈더의 성모>, 1501 ⓒ김슬기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계란 요리를 하는 노파>, 1618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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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는 의외의 작품도 하나 만났습니다. 런던 내셔널갤러리를 찾았을 때 볼 수 없어 관람객들을 탄식하게 한 그림이 이 곳에 있었던 겁니다. 200주년을 맞은 내셔널갤러리는 5월 10일부터 한 해동안 자신들의 보물 12점을 영국 전역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케임브리지로,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브라이튼으로, 모네는 요크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에딘버러를 찾은 보물은 바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37점 뿐인 작품 중 하나인 <버지널 옆에 선 젊은 여인>(1670-1672)입니다. 실크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를 한 젊은 여인이 델프트 타일이 깔린 방에 서 있습니다. 창으로 빛이 스며드는 방에 홀로 있는 여인의 주변에는 값비싼 건반악기 버지널(Virginal)과 그림, 장식들이 있어 여인의 신분을 알려줍니다.
이 도시로 특별히 베르메르가 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미술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으로 베르메르의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54-1655)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단 한 점 뿐인 베르메르지요. 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빛의 사용과 옷주름 등을 자세히 보면 이 초기작에서는 그의 특징적인 화법이 온전히 구현되진 않은 듯 보입니다.
베르메르는 평생을 델프트의 풍경과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그림 중 하나 뿐인 성경을 주제로 삼은 그림은 이 한 점 뿐입니다. 이 특별한 주제 덕분에 이 그림은 델프트의 예수회 후원자의 의뢰를 통해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4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베르메르는 무려 15명의 자녀를 낳았고, 생계를 위해 분투했던 가장이었습니다.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대변한 대표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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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갤러리가 자랑하는 12점의 보물들은 영국 전역 미술관으로 출타 중. ⓒ김슬기 |
요하네스 베르메르 <버지널 옆에 선 젊은 여인>, 1670-1672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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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1654-1655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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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 낯설고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그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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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랜드지어의 '글렌의 군주', 1851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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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는 뭐가 있을까요. 하이랜드의 광활한 자연과 이 곳에만 자생하는 거대한 붉은 사슴과 소 등의 동물들을 떠올릴 수 있을겁니다. 위스키 이름에 단골로 등장하는 글렌(Glen)이라는 단어는 스코틀랜드 언어인 게일어로 '계곡'을 뜻합니다. 지명에도 숱하게 등장하는데, 하이랜드 최고의 관광지 또한 해리포터 열차를 직접 볼 수 있는 글렌코입니다.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는 바로 에드윈 랜드지어의 <글렌의 군주>(1851)입니다. 이 대작 앞에서는 위풍당당한 사슴의 모습에 압도됩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 우뚝선 이 강인한 모습은 스코틀랜드인들과 너무 잘 어울립니다.
이 지역이 배출한 화가들은 광활한 자연을 주로 그렸습니다. 에딘버러성과 세상의 끝을 만난 것 같은 바다의 암벽을 그린 그림이 많습니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그림들입니다. 그리고 끝없이 잉글랜드의 침략을 받은 자국의 역사도 주로 소재로 등장합니다.
스코틀랜드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유파는 '글래스고 보이즈(Glasgow Boys)'입니다. 1880년대 초, 스코틀랜드 모더니즘 미술이 태동했습니다. 미술계가 역사화를 강조하는 것에 환멸을 느낌 동시대 젋은 작가들은 실외로 뛰쳐나갔습니다. 시골 생활과 자연 환경을 기록하며 문 밖에서 일했습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사실주의, 미국의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게다가 산업혁명 이후 세계적인 산업 중심지가 된 글래스고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제임스 거스리 경과 존 레이버리가 이끈 글래스고 보이즈는 미술상 알렉산더 리드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인상주의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까지 흡수했습니다. 찬란한 색감과 평면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이들은 19세기말 유럽 전역에서 전시를 하며 국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글래스고 보이즈 전시에서 만난 그림 중 두 점을 골라 먼저 소개해봅니다. 칼을 들고 농장에서 일하는 소녀를 그린 제임스 거스리의 <힌드의 딸>과 거친 붓질로 광폭한 자연을 그린 윌리엄 맥타가트의 <폭풍>입니다. 글래스고 보이즈의 대표적 도상이죠. 이번 전시를 통해 이들의 다채로운 화풍을 즐겁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여행지 글래스고에서도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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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거스리의 <힌드의 딸>, 1883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
윌리엄 맥타가트의 <폭풍>, 1890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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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군중의 한가운데>, 2024. ⓒ디스위캔드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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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들어 런던 화랑가에서는 새로운 전시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10월 '프리즈 위크'에는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대거 열릴 예정입니다. 첫 테이프를 끊으며, 1달 앞서 찾아온 전시가 있습니다.
메이페어의 No.9 Cork Street에는 프리즈에서 운영하는 갤러리가 있습니다. 프리즈가 직접 기획해 젊은 작가를 소개하거나, 위탁받은 화랑이 기획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1층에는 리만머핀의 테레지타 페르난데스의 <Astral Sea>(9월 5~21일)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주와 심해를 평면에 표현한 듯한 반짝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2층 전시장에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김진희의 개인전 <Drink Water>가 디스위캔드룸의 기획으로 9월 5일부터 21일까지 이어집니다. 1990년생 젊은 작가의 런던 입성입니다. 올해 초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Time Lapse>에서도 이 작가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아트페어에서 많은 인기를 자랑하는 오픈런 작가이기도 합니다.
작가가는 물을 마시는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모습을 대형 캔버스에 펼쳤습니다. 프리즈는 이 전시에 대해 "물을 마시는 일상적인 행위를 은유로 삼아 인종, 문화, 성별, 언어의 구분을 넘어 정체성의 의미를 고민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림 속 여성들의 국적이나 나이, 직업에 대한 단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물을 마시는 일상적 행위만이 보이죠. 슈퍼마켓에서 물을 사고,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평범한 행동은 인위적인 인간에 대한 분류를 없애는 장치가 됩니다.
마네킹 같은 사람들에게는 보라색, 갈색 등이 혼재된 색상으로 인해 금속성의 질감이 느껴집니다. 멀리서 그림을 보거나 이미지로만 접하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선이 매끄럽고 색감이 부드럽습니다. 색의 그라데이션이 믿기지 않을만큼 섬세한데, 에어브러쉬를 쓰는지 물어봤지만 작가는 붓으로만 작업을 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이 전시에서 처음으로 작가는 정물화도 그렸습니다. 소품으로 그려진 물병들은 무국적의 군상들과 분리된 작은 공간에 촘촘히 걸려있습니다.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이 표정 없는 금속 인간들은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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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의 <Drink Water> 전시 전경. ⓒ김슬기 |
김진희의 <Drink Water> 전시 전경.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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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데우스로팍 <Embodied Forms>
- 9월 28일까지
회화 그룹전 <Embodied Forms>에는 Carolina Aguirre, Dean Fox, Olga Grotova, Michael Ho, Effie Wanyi Li, YaYa Yajie Liang, Eva Helene Pade 등의 작가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한 상상력과 작가들의 개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예상 못한 전시도 있었습니다. 갤러리 입구쪽 한 공간에는 제이디 차의 작품도 가득 걸려 있었습니다. 구미호와 삼신할매 같은 한국의 설화적 상상력이 런던에서 전시되는 모습은 꽤 재미있는 풍경이었습니다. |
- 페이스갤러리, <낮과 밤 사이>
- 9월 28일까지
쿠바의 신진 작가 알레한드로 피네이로 벨로(Alejandro Piñeiro Bello)가 페이스에서 첫 전시를 열었습니다. 층고가 넓고 웅장한 전시장을 전혀 위축되지 않는 거대한 대작들을 걸어놓았습니다. 초현실적인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쿠바의 바다와 사람들은 마치 음악처럼 그림 속에 녹아듭니다. 밝고 경쾌한 색채가 인상적인 작가입니다. 페이스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 제3세계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여타 메가갤러리와는 다른 움직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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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연휴가 끝났지만 슬퍼하지 마시길! 다음주에는 글래스고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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