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가득한 글래스고는 첫 인상부터 낯설었습니다. 머물었던 사흘내내 비가 흩뿌리는 흐린 날씨는 도시를 무채색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날씨로 악명이 자자한 이 도시의 공원과 녹음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시의 풍경을 만드는 건 자연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 저는 아주 인상적인 살바도르 달리와 김보희의 그림을 만났고 좋은 추억을 남긴 채 런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5회 (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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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51년에 설립된 유서깊고 아름다운 글래스고 대학은 캘빈 강과 캘빈 그로브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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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파이프 오르간이 유명한 켈빈그로브 뮤지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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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고 특유의 붉은 벽돌로 건축한 이 뮤지엄은 해리 포터에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러운 외관이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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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오르간 연주는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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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드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미술관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영화 해리 포터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고풍스러운 외관의 켈빈그로브 아트 갤러리 앤드 뮤지엄(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은 성격은 독특합니다. 1901년 개관한 이 뮤지엄은 로비가 매우 넓고 높습니다. 파이프 오르간까지 있어서 대성당처럼 보입니다. 이 파이프 오르간은 평일의 경우 오후 1시부터 30분간 연주되는데 이 시간이면 입장객들로 북적거릴만큼 인기가 많았습니다.
1층의 한쪽 윙은 기린과 코끼리, 알바트로스의 박제가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비행기 모형과 함께 걸려있었고 반대편 윙은 글래스고가 자랑하는 건축 디자이너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디자인과 스코틀랜드의 복식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에서는 미술 전시가 이어집니다. 마치 자연사박물관, 생활사박물관, 미술관이 한 식구처럼 모두 모여있는 듯한 구조였습니다. 말그대로 글래스고를 알려주는 모든 것을 한 곳에 모은 듯한 뮤지엄이었습니다.
켄빈 그로브의 회화 컬렉션도 에딘버러 국립 미술관에 뒤지지 않을만큼 화려했습니다. 갤러리는 크게 3개의 공간으로 구분됩니다. 스코틀랜드 미술, 네덜란드 미술, 프랑스 미술을 각각 전시합니다. 인상파 컬렉션도 반 고흐, 모네, 세잔, 피사로, 르누아르 등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글래스고 보이즈'의 고향답게 이들의 컬렉션도 고루 전시합니다. 글래스고 보이즈는 20여명의 작가들이 느슨한 연대를 가지고, 스튜디오를 공유하며 활동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실주의 문학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에딘버러에서 만났던 익숙한 이름이 많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색채주의자(Scottish Colourists)의 방도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와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캔버스에 강렬한 색을 사용한 화가들입니다. F.C.B.카델, J.D.퍼거슨, 레슬리 헌터, S.J.페플로 등은 1900~1930년 과감한 색채의 사용으로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대륙의 미술이 급변하던 시기, 영국에도 비슷한 흐름이 건너온 셈이지요. 글래스고 보이즈와는 대조적으로 장식적이고 화려합니다. 당시 시민들은 "너무 밝고, 너무 현대적이며, 너무 프랑스스럽다"며 비판했다고 합니다. 아방가르드는 어느 시대에나 한결같이 푸대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국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왕국의 어느 곳을 가도 만날 수 있는 월터 스콧의 초상화와 동상도 물론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에딘버러에 있는 가장 높은 건축물은 고딕 양식으로 쌓은 월터 스콧 기념탑이었습니다. 심지어 에딘버러의 중앙역은 이름이 '웨이벌리'입니다. 월터 스콧이 자코바이트 전쟁을 다룬 역사 소설의 이름에서 따왔죠. 작가를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하는 곳, 스코틀랜드는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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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uncan Fergusson <Head of a Girl >, 1917 ⓒArt UK |
Francis Campbell Boileau Cadell <Reflections>, 1915 ⓒArt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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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달리는 왜 글래스고의 보물이 됐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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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안에 높이 걸린 그림은 짙은 음영을 드리우며 관람객을 내려다본다.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스도(Christ of Saint John of the Cross)>, 1951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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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처럼 이 그림 하나만을 보기 위해 이 도시에 오는 사람이 있을만큼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스도(Christ of Saint John of the Cross)>(1951)입니다.
2층에 별도로 만들어진 어두운 방에서는 고고한 빛이 이 그림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길게 줄을 늘어선 인파는 마치 루브르미술관의 <모나리자>를 연상시킵니다. 남녀노소 시민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 방에 입장하고는 마치 홀린 것처럼 이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말 없이 나왔습니다.
1950년대 괴짜 작가 달리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녹아내리는 시계가 떠오르는 화가가 이런 성스러운 종교화라니요. 칠흙같이 어두운 배경 속에 예수가 보입니다. 완벽한 육체의 예수가 천상에 매달려 지상을 내려다봅니다. 구름 아래에는 호수와 정박된 배와 어부가 있습니다. 육체의 삼각형은 삼위일체를 상징합니다.
달리의 그림에 영감을 준 건 16세기 스페인의 신비주의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의 드로잉이었습니다. 달리는 그림의 제목을 통해 영감을 받은 대상을 밝혔죠. 게다가 달리는 이 그림을 구상하며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는 스페인 북구 카탈루냐 해안의 포트 리가트의 풍경 위에 걸린 십자가와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곳은 당시 달리가 살던 마을이었죠. 두번째 꿈은 피와 고통이 없는 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꿈은 예수가 피를 흘리지 않고 가시면류관을 쓰지 않은, 고통의 표정도 보이지 않은 신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그리게 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꿈 속의 이미지를 그렸던 달리가 갑자기 발표한 종교화는 비평가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관람객들은 이 그림에 즉각적인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52년 글래스고 박물관장 톰 하니먼은 런던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해 돌아오자마자 달리의 에이전트와 협상 끝에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당시에는 미대생들을 비롯해 교회에서도 "모독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8,200파운드에 구입했는데, 당시로서는 큰 비용이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전시되자 대중의 반응은 압도적이었습니다. 1952년 6월부터 전시된지 2달만에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1961년 관람객의 습격을 받아 찢어졌다가 복원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2006년에는 스코틀랜드 설문조사에서 무려 29%의 선택을 받아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은 이 국민 화가의 그림을 되찾기 위해 8000만 파운드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림을 귀국시키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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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기 위한 줄이 길다. 달리의 방은 언제나 인산인해. ⓒ김슬기 |
살바도르 달리가 영감을 받은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의 드로잉.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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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 더 모던 인스티튜트와 김보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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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희 전시 전경. 층고가 높고 통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는 갤러리.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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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여행의 종착지는 더 모던 인스티튜트(TMI)입니다. 글래스고를 대표하는 화랑으로 글래스고 도심에 두 곳의 전시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3년 프리즈 서울에서 전시장을 통째로 변신시키는 파격적인 전시를 해서 눈길을 끌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글래스고는 삭막한 도시 구석구석마다 그래피티가 숨어있는 도시입니다. 런던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시청 광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대학가와 빌딩가에서 건물 크기의 거대한 그래피티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TMI도 옛 석탄저장소 자리를 재생시킨 그래피티가 그려진 골목 어귀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글래스고 대학에서 그래피티 작가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 니콜라스 파티가 공부를 했습니다. 파티를 발굴한 화랑이 TMI입니다. 화랑에 비치된 도록에서 이 공간을 니콜라스 파티가 어떻게 채웠는지 구경했습니다. 마치 파충류처럼 이질적인 색상의 인물화와 조각으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더군요.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화가 김보희도 스코틀랜드에서의 첫 개인전 <Beyond>(6월 7일~9월 17일)를 열었습니다. 제주에서 그린 익숙한 <Towards>, <The Seeds> 연작이 10점 걸려 있었습니다. 푸른 바다와 반려견 레오, 산방산 봉수대 위로 뜬 달, 아열대 식물들이 있었습니다. 전시장 한가운데는 태풍이 불어도 뽑히지 않는다는 튼튼한 나무의 씨앗이 입체 작품으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글래스고에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유명한 식물원이 있습니다. 그곳 온실에서 만났던 아열대 식물들이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으니 시민들은 더 반가웠을 것 같습니다. 한 방문객이 조용히 속삭이는 말을 들었습니다. "향수로 가득해지는 경험입니다. 아름다운 그림들이예요."
"존 컨스터블을 비롯한 다양한 영향이 담겨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을 강조하고 도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는 한국의 전통 산수화의 혈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화랑의 설명은 한국의 그림을 영국인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지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녹색으로 가득한 그림들은 하나같이 고독한 사색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없이 자연만 존재하는 풍경화를 현대인들이 좋아하게 된 건, 꼭 우리가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왔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영국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정원 가꾸기와 식물, 꽃을 좋아합니다. 영국 최고의 복지는 공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공원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구요. 식물 작가, 김보희가 유럽 데뷔전을 영국에서 하게 된 것은 좋은 만남인 것 같습니다. 한국 작가들의 영국 전시 개막이 이제 한달 내내 이어집니다. 건투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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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석탄저장소 자리를 재생시킨 그래피티가 그려진 골목 어귀에 숨어 있는 더 모던 인스티튜트. ⓒ김슬기 |
거리에서는 큰 창을 통해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이 보인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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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서는 그림과 창밖의 거리가 나란히 보이는 구조. ⓒ김슬기 |
제주의 열대 식물을 그린 <Towards>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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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들라르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1833 ⓒNational Galle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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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제나 관람객들로 북적이는 미술관이지만, 이 미술관의 한 방에는 셀카를 찍는 젊은 관람객, 학생들이 넘쳐나 줄을 서야할 정도로 붐비고 있습니다. 19세기에 폴 들라르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드디어 비참한 인생이 끝나 평화를 누리게 되어 기쁘다"고 탄식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아시는지? 헨리 8세의 여섯 부인 중 하나로 15세의 나이로 단 9일동안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처형을 당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폴 들라르슈는 실제로는 런던탑의 야외에서 진행된 처형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어둡고 좁은 실내에서의 사건으로 묘사했습니다.
제인 그레이의 마지막 순간을 낭만적이고, 고전적인 터치로 그린 프랑스 화가의 대작은 원래도 이 미술관의 인기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불을 붙인 사건이 있습니다. 틱톡에서 많은 유저들이 이 그림에 관한 자신의 감상을 올리며 그야말로 '밈'이 된 겁니다. 수십만회, 수백만회를 기록한 숏폼 영상이 바이럴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스타 도슨트들이 작가만큼 인기를 얻는 것과 비슷한 현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10대 여왕은 비극적인 인생으로 인해 컬트적인 인기를 꾸준히 얻어왔습니다. 최근 훌루를 통해 드라마 <마이 레이디 제인>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림의 생애도 험난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그려졌지만 러시아로 건너갔다가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1928년 템즈강의 대홍수로 갤러리가 황폐화되면서 파괴된 것으로 오래동안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50년 후인 1973년, 테이트의 큐레이터 크리스토퍼 존스톤이 우연히 재발견하면서 이 그림은 극적으로 부활했습니다. 9일의 여왕을 그린 그림은 앞으로도 긴 수명을 자랑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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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 있습니다. 프레데릭 레이턴의 집입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왕립 아카데미의 원장이었던 그는 탐미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각국에서 수집한 도자기와 그림들, 자신의 스케치와 그림, 고전 걸작으로 가득한 이 집이 대중에게 무료로 오픈되는 날, 이 곳을 찾았습니다. 수집품과 아기자기한 실내도 인상적이었지만, 정원과 집 자체가 정말 아름답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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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이제 런던으로 돌아갑니다. 프리즈 위크를 앞두고 리젠트 공원에 조각들이 설치됐고 런던 조각 주간도 시작됐습니다. 10월에는 쟁쟁한 전시들이 쏟아집니다. 런던 미술 여행을 위한 알찬 정보를 담은 프리뷰를 준비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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