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놀랍게도 저는 아직도 여행중입니다. 지난주 노르웨이를 다녀왔고, 지금은 마지막 여행지 더블린에 있습니다. 6월 이후에만 아트 바젤을 위해 찾았던 스위스를 제외하고도, 독일, 남프랑스, 북유럽 4개국, 에스토니아, 아일랜드를 다녀왔습니다. 놀랍게도 이 기간에 찾은 미술관만 30여개가 넘네요. 시즌2는 생각보다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귀국후에도 가능한 매주 뉴스레터를 써볼 생각이지만, 형식과 길이가 좀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일단 프리즈 서울을 끝내야 9월부터 본격적으로 북유럽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시즌1의 마지막 도시는 나폴리와 로마입니다. 대단원을 장식하는 이야기는 특별히 에피타이저-메인-디저트의 3코스로 준비했습니다. 지난 1달간의 편지가 모두 하나로 만나는 이야기이자, 우연과 행운이 만든 여행의 결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년 동안 애독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에는 번외편이 있습니다.)
50회 (2025. 8.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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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보스코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은 도시처럼 낡고 한참 수리중이라 전시 공간의 제약이 있었다. 그럼에도 미술관이 있는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나폴리 바다와 도시의 뷰는 정말 최고였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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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자비의 일곱가지 행위를 만난 나폴리의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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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 내부는 재단화로 둘려싸여 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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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 입구 ©김슬기 |
<자비의 일곱 가지 행위>, 1606-07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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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리플리>에서 앤드류 스콧이 <자비의 일곱가지 행위>를 만나는 순간. ©Netfli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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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세기의 전시를 본 이튿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나폴리로 향했습니다. 나폴리행은 단 한 점의 그림을 보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드라마 <리플리>에는 살인으로 궁지에 몰린 리플리(앤드류 스콧)가 카라바조의 이 그림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에 걸린듯 전율하는 명장면이 등장하죠. 자신을 살인자 화가와 동일시하는 순간입니다.
이 그림이 바로 <자비의 일곱가지 행위(The Seven Acts of Mercy)>(1606-1607)입니다. 북적이는 나폴리 중심지에 숨어 있는 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Pio Monte della Misericordia, 자비의 산을 뜻함)은 이 그림을 보기 위한 순례자들이 찾는 곳입니다. 1601년 일곱 명의 젊은 귀족이 병자를 돌보기 위해 설립한 이 교회는 지금은 미술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15분 간격으로 15명의 관람객의 입장만을 허용하는 곳인데, 다행히 기다리진 않아도 되더군요.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서 이 그림을 보게 됩니다. 후대의 화가들이 그린 재단화들이 원형의 성당을 둘러싸고 걸려있지만, 이 성당은 카라바조를 위한 성당입니다.
당시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저지른 살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교황령을 벗어나 도주했습니다. 나폴리 왕국의 수도에서 그는 보호자를 찾게 되고 7인의 창립자 중 예술 감정가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만조에게 이 교회의 첫 재단화를 의뢰받죠. 사형선고가 목줄을 죄던 시기 구원을 갈망하며 그린 제단화는 그의 삶과도 겹쳐지며 더 큰 감동을 줍니다.
마태복음에 묘사된 자비의 행위는 12세기 이후로 교회의 주요한 재단화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작품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위는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자비의 성모, 아래는 어둡고 좁은 골목 안에 얽혀 있는 인물을 통해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위를 묘사합니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죽은 자를 묻고, 술례자를 맞이하고, 병든 자를 위로하고, 죄수를 방문하는 행위입니다. 교회의 자선을 알리는 선언문과 같은 이 그림을 통해, 성도들은 자비와 연민을 공감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재단화를 완성한 1607년 1월 9일 카라바조는 400두카트를 받았습니다.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2억원이 넘는 엄청난 돈이었죠. 놀랍게도 카라바조는 정말 부유한 도망자 예술가였던 겁니다. 이 작품은 나폴리 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나도나도 그림을 따라그려 판매하면서, 1613년 피오몬테 추기경은 이 그림의 복제와 판매를 금지했을 정도입니다.
성당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추기경이 홀로 이 그림을 볼 수 있었던 2층의 합창석도 있더군요. 미술관으로 꾸며진 공간에서는 이 유명한 그림에 영감을 받은 칸디다 회퍼, 아니쉬 카푸어,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등 동시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품도 전시해 놓았습니다. 카라바조는 불멸의 예술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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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Acts of Mercy> ©김슬기 |
칸디다 회퍼가 베를린 신 박물관을 촬영한 작품.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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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참회하는 마리아를 만난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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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나무가 자라고 있는 미술관 정원. 분수와 정원이 가운데 자리잡은 정방형의 건축물을 정면에서 사진으로 담을 방법이 없었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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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알가르디의 흉상 등이 있는 벨벳 직물로 꾸며진 벨벳룸. ©Doria Pamphilj |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두 걸작이 걸려 있는 곳이자, 가장 거대한 방인 알도브란디니홀. ©Doria Pamphil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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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hael <Double portrait>, 1516 ©Doria Pamphilj |
Titian <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1515 ©Doria Pamphi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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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나폴리 여행을 마치고 계획과 달리 로마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기왕 돌아왔으니 들러볼 만한 곳이 있었죠. 이번 여행에서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Doria Pamphilj Gallery)을 빠트릴 순 없었습니다.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은 로마 중심부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에 위치한 팜필리 가문 후손이 소유한 사립 미술관으로, 16세기부터 현재까지 도리아 팜필리, 알도브란디니 가문에 의해 수집된 400여 점의 회화·조각·가구를 품고 있는 곳입니다.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인 팜필리 가문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위 1644–1655)가 1651년 갤러리를 설립해, 18세기 초 현재의 벨에포크풍 살롱 양식으로 개조된 곳이죠. 로마에서 방문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개인 궁전일 겁니다. 바티칸 미술관에 비해 관람객은 적어서 관람 환경은 쾌적했지만, 역시나 낡고 관리가 잘 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흔한 유적지를 방문했을때처럼요.
입구를 통과하면 곧장 나오는 볼룸을 비롯해 푸생룸, 주피터룸, 벨벳룸 등의 공간은 각기 다른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전통대로 벽의 천장부터 바닥까지 빽빽하게 빈틈없이 그림을 걸고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인데요. 놀랍게도 많은 걸작이 설명 한 줄 없이 무심하게 걸려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이 정도의 걸작들은 흔하게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처럼요. 이 풍요로운 나라는 정말 간절함이 부족합니다.
간판 작품으로는 라파엘로의 <이중 초상화>, 티치아노의 <세례자 요한의 목을 든 살로메>가 유명하고 베르니니, 알가르디의 대리석상도 볼거리입니다. 라파엘로의 <이중 초상화>는 베니스의 문인 아고스티노 베아차노(Agostino Beazzano)와 안드레아 나바게로(Andrea Navagero)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했는데요. 이 초상화는 당시의 저명한 베네치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티치아노의 초기 걸작 <세례자 요한의 목을 든 살로메>는 티치아노의 화풍이 이미 상당히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피비린내나는 그림의 서사와는 달리 인물들은 서정적이고 온화하게 묘사되어 있죠. 일부 학자들은 세례자의 머리가 예술가의 자화상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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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작품 세 점이 나란히 걸려있는 방.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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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itent Mary Magdalene>, 1597 ©Doria Pamphilj |
<Rest on the Flight into Egypt>, 1597 ©Doria Pamphi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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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마지막으로 붙잡는 방은 거울의 전당을 지나서 나타납니다. 카라바조의 작품 세점이 나란히 걸린 방입니다. 왼쪽부터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Penitent Mary Magdalene)>, <이집트로 도피 중의 휴식(Rest on the Flight into Egypt)>, 그리고 <세례요한(St. John the Baptist)>(1602)이 나란히 걸려 있죠.
로마 활동 초기인 1597년에 그린 <이집트로 도피 중의 휴식>에서는 여전히 롬바르디아와 베니스 화풍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천사와 아이를 팔에 안고 잠든 성모가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려져있죠. 전형적인 종교화의 모습입니다. 밝은 배경과 정교한 정물의 묘사도 자연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놀랍게도 같은 해에 그린 왼쪽의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두 그림 속 여인 성모 마리아와 막달레나 마리아가 고객를 떨군 모습이 무척 닮았습니다. 같은 모델을 사용한 걸 알 수 있죠.
미술사학자 로셀라 보드레(Rossella Vodret)에 따르면 이 모델은 12세에 로마에서 매춘부가 된 토스카나 출신의 안나 비앙키니입니다. 풍성하고 빨간 머리와 도자기 같은 피부를 가진 여인이었죠. 귀족을 상대하던 필리드 멜란드로니와는 달리 거리의 비천한 서민들과 어울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안나는 카라바조의 그림에 무려 네 번이나 모델로 등장합니다. 안타깝게도 안나는 교황 클레멘스 8세(1592-1605)의 가혹한 정책의 희생자였죠. 도덕성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교황은 매춘부들을 반나체로 채찍질한 후 당나귀에 태워 로마 시내를 돌게 하는 잔혹한 처벌을 가했습니다. 안나 비안키니도 처벌을 받았고, 그녀가 부어오른 손과 굽은 몸, 흘리는 눈물은 이 형벌로 인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지난주에 소개했던 여성화가 지네브라 칸토폴리의 그림 <터번을 쓴 여인>가 기억나시는지? 교황 클레멘트 8세는 베아트리체 첸치의 참수형 배후에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림 속 이야기를 들여다봅시다. 예수를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방탕한 삶을 참회합니다. 향유병 옆의 끊어진 진주 목걸이와 보석들이 이를 상징하죠. 저는 여기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한 쌍의 검은 리본이 묶인 진주 귀고리입니다. 걸작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에서 유디트의 귀에 걸린 진주 귀고리를 발견한 겁니다.
머리속에서 '딸깍'하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597년과 1599년 사이 모델과 주제는 달라졌을지언정 안나의 진주 귀고리는 카라바조의 머리 속을 지배했던 주제였던 겁니다. 유디트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그는 자신이 목격한 핍박받는 여인의 초상을 반복적으로 그린 겁니다. 안나가 또 한 번 등장하는 그림은 공교롭게도 <마르다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필리드 멜란드로니(마리아)와 나란히 마르다의 모델로 등장하죠.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는 여러면에서 혁신적입니다. 배경이 검은색은 아니지만 색채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목에는 주름이 있고, 코에는 진주 같은 눈물 방울이 맺혀 있죠. 게다가 그녀의 옷은 16세기의 옷입니다. 이 작품이 단순한 종교화를 넘어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다룬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동시대의 성모를 창조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텅빈 방을 가로지르는 빛은 그의 후기 테네브리즘(Tenebrism)의 탄생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죄와 구원, 절망과 희망을 주제로 그린 이 그림은 지금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마지막으로 훗날 자신의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작품이 된 <동정녀의 죽음>에서도 24세에 세상을 떠난 안나를 모델로 삼아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이 재단화가 카라바조에게 얼마나 각별한 의미가 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카라바조의 동시대 의사이자 작가였던 줄리오 만치니(Giulio Mancini)는 카라바조가 성모의 모델로 "오르타치(테베레 강변의 동네)의 더러운 창녀, 그의 창녀 중 한 명, 그가 사랑했던 창녀"를 그렸다고 기록했습니다. 파리와 로마, 나폴리로 이어진 여정에서 제가 만난 카라바조는 이처럼 거리의 여인, 어쩌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꼈던 화가였습니다.
자신의 삶은 속죄 받지 못했지만, 카라바조는 안나의 삶에는 한 줄기 구원의 빛을 그려넣는 낭만적인 화가였습니다. 삶은 때때로 잔인하고, 불행은 쉽게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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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기적처럼 만난 카라바조의 천장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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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유일한 벽화 <Jupiter, Neptune and Pluto>. ©Palazzo Barberi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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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저택 카지노 본콤파니 루도비시. ©김슬기 |
곡면 천장에 그려졌지만 원근법을 탁월하게 사용해 입체적으로 보인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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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예상 못한 보너스가 있었습니다. 나폴리에 도착한 날 밤, SSC나폴리가 세리에A 최종전에서 우승을 하는 바람에 밤새 폭죽이 터지는 광란의 밤을 난데없이 경험하느라 혼이 나갈 뻔했지만 예상 못한 행운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카라바조 2025> 전시 기간 동안 티켓 소지자를 대상으로 비공개 전시가 있었습니다. 사유지에 있어 일반에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카라바조의 유일한 벽화 작품 <목성, 해왕성, 명왕성(Jupiter, Neptune and Pluto)>이 전시의 25번째 작품으로 특별히 공개된 겁니다. 1시간에 10명만 참여하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는 볼 수 있는 전시는 당연히 폐막까지도 모두 매진이 된 상황이었죠.
로마행을 앞두고 티켓을 구하는데 실패했던 저는 미술관에 간곡한 이메일을 썼지만,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나폴리에서 뒤늦게 초대 메일을 받았습니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포기하고 곧장 로마행 기차표와 로마발-런던행 비행기표를 다시 끊었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로마 보르게세 공원 인근의 카지노 본콤파니 루도비시(Casino Boncompagni Ludovisi)라는 1570년에 지어진 저택으로 달려갔습니다. 2022년 경매에 4700만 달러에 출품되며 화제를 모았으나 새 주인을 찾지 못한 로마 부촌의 대저택이었죠. 카라바조의 벽화로 유명세를 얻은 곳이었습니다.
이날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 10명은 모두 기대감에 부풀어, 이탈리아인 도슨트의 안내를 따라 40분간 이 공간을 관람을 했습니다. 델 몬테 추기경이 살았던 이 저택에는 구에르치노의 유명한 천장화 <Aurora>가 응접실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낡고 관리가 잘되지 못한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저택은 귀한 명화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작은 방에 카라바조가 숨어 있었습니다. 비밀의 공간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의 개인 연구실이자 연금술 실험실이었던 증류실(Distillery room)이었습니다. 델 몬테 추기경은 <카드샤프>,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등을 의뢰한 카라바조의 열렬한 후원자였죠.
카라바조는 연금술에 미쳐있던 후원자 델 몬테 추기경의 연금술 실험실에 원소기호와 이름이 같은 목성, 해왕성, 명왕성에 관한 그림을 그린 겁니다. 길이 3미터 남짓한 작은 크기로 벽화에 주로 사용하던 프레스코화가 아닌 유화로 그려졌더군요.
<목성, 해왕성, 명왕성>은 카라바조가 회화적 실험을 하면서도, 자신의 후원자를 귀신같이 매혹시킨 영리한 화가였음을 알려줍니다. 그림 속에서 후원자의 지적 세계를 형성하는 연금술, 신화, 과학이 교차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세 그리스신은 각각 연금술의 세 단계인 정화, 분리, 재결합을 상징하며, 카라바조는 세 인물 모두에 자신의 얼굴을 투영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16세기 말 로마 지식인 사회의 문화적 풍경을 반영하는 ‘시각적 연금술’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그림은 그가 원근법 표현에 서툴다는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거울을 사용해 복잡한 시점을 구현했다는 전기적 기록을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고개를 들고 천장화를 바라보니, 미켈란젤로만큼이나 입체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우연한 여행으로 저의 카라바조 순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런던, 스페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관들이 1년 동안 경쟁적으로 카라바조의 특별전시를 열어준 덕분에 가능한 이행이었습니다. 잘 몰랐던 옛 화가의 삶을 이렇게 깊이 들여다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 17세기의 악명높은 화가가 오늘날 화려하게 부활하는 이유가 궁금해지더군요.
나폴리에서, 그리고 돌아온 로마에서 만난 작품들은 하나같이 속죄와 참회, 그리고 용서를 주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그림에서 '나'를 발견할 때 위로는 찾아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비의 일곱 가지 행위>를 마주한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불완전한 인간 카라바조가 그린 위로의 예술은 힘이 셉니다.
저는 이번 유럽 여행에서 53점의 카라바조를 만났습니다. 빠듯한 일정으로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성 바오로의 개종>과 <성 베드로의 처형>을 만나진 못했지만 다음 여행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그가 일생에 걸쳐 그린 70여점 중 궁금했던 대표작은 다 본 것 같습니다. 이 도장깨기만으로도 1년의 유럽 생활에 더이상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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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르치노의 천장화 <Aurora>.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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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의 베르니니의 <Portrait of Pope Innocent X Pamphilj>는 한 방에서 전시된다. ©Doria Pamphil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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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지금까지 소개한 그림들이 아닙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입니다. 벨라스케스 캐비넷이라는 독방에는 1650년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로마 여행 당시에 그린 이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대 최고의 조각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가 카라라 대리석으로 조각한 교황의 흉상과 나란히 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그림은 교황의 거칠고 추악한 얼굴을 숨기려 시도하지 않습니다. 마치 영혼까지 표현한 것 같은 사실적인 묘사에 교황은 "너무 사실적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림과 대조적으로 베르니니의 조각은 영웅적으로 이상화되어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교황을 표현했죠.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오마주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스페인 예술가 벨라스케스는 1649년 말에서 1650년 1월 사이에 국제 정치가 크게 변화하는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1648) 이후 교황권은 친프랑스 정책을 포기하고 합스부르크 스페인으로 다시 한 번 동맹을 맺고 가까워 집니다. 교황은 스페인에서 초청한 이 화가가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주길 바랐을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이 더해지면서 많은 예술가와 미술 평론가들은 이 초상화를 역사상 최고의 초상화라고 극찬해왔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는 이 그림이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저는 구원의 종교를 이끌던 교황들이 얼마나 잔인한 정치 지도자였는지, 팔라조 바르베리니와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의 그림 속 여인들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 거듭 목격한 뒤에 이 초상화를 만났습니다. 교황의 본성을 꿰뚫어본 벨라스케스의 용기와 탁월한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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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초상화 미술관 <Jenny Saville: The Anatomy of Painting>
- 3월 12일–6월 27일
런던에서 소개하는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존 여성 작가중 두번째로 비싼 작가, 영국의 대표하는 초상화가 등등 제니 사빌을 수식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미술관에서 직접 만나봐야 그 엄청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작가입니다. 초상화 미술관을 그야말로 씹어먹고 있는 인기 전시에서 자화상을 비롯해 다양한 체형과 인종의 인물들을 끊임없이 변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이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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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련님들이 떠났던 그랜드투어는 런던에서 출발해 로마에서 끝나는 여정이었습니다. 스페인 계단은 여행을 마친 이들이 도착해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죠. 이 곳에 도착했을때 저는 홀가분한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험난한 여행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른채 말이죠.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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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50주 동안의 런던에서 로마까지의 미술관 여행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볼 생각입니다. 다음주 런던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에서도 못다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게요.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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