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갤러리의 소중함은 유럽을 한 바퀴 돌고온 다음에 더 절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세인즈버리윙을 확장하면서 더 쾌적해진 이 미술관은 티켓 가격 부담없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습니다. 리노베이션 이후 생긴 1층 에스프레소바는 슬쩍 들러볼만 합니다. 생크림 브리오슈가 맛이 있고, 런던에서는 드물게 에스프레소도 맛이 있습니다. 물론 가격은 사악하지만요.
내셔널 갤러리는 서점도, 아트숍도 백화점처럼 큰 루브르 박물관에 비해 소박하고 아기자기합니다. 그럼에도 영국 미술관들은 공통적으로 서점이 특히 훌륭합니다. 메자닌층(1.5층)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의 서점은 유럽 전역에서 전시중인 도록도 실시간으로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짐을 싸서 한국에 가야할 상황만 아니라면 사고 싶은 책이 잔뜩 있어 늘 군침만 삼켰습니다.
2. 내셔널 갤러리, 티치아노의 방
리모델링 이후 고전 미술을 전시하는 세인즈버리윙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통과하면 르네상스 미술이 펼쳐집니다. 5월 재개관 이후 이 미술관에서 독립된 방을 얻은 작가로 티치아노(Titian, 1507~1576)가 있죠. 이 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이렇게 호화스러운 방을 가진 미술관은 내셔널 갤러리밖에 없을 겁니다.
티치아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카라바조를 잇는 16세기의 작가인데요. 86세까지 살며 베니스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어낸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솜씨로 다채로운 주제를 그린 그는 '회화의 군주'라는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티치아노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1520-3)는 바쿠스가 아르아드네에 반한 순간을 그렸죠. 라파엘로를 모방하고 심지어 능가하려 했던 거장은 그림 속 인물들의 역동적인 자세를 위해 고대 로마 조각품인 라오쿤(Laocoön)의 인물들을 참조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그림 속에서 마차를 끄는 두 마리 치타와 이 들의 주변에 있는 강아지들이 너무나 귀엽다는 겁니다. 동물 그림이 유난히 많은 이 미술관에서도 티치아노 만큼 동물에 진심은 화가는 없습니다. 16세기 돈을 쓸어담던 이 거장은 놀랍게도 엄숙한 종교화나 신화화 속에도 동물들을 그려넣곤 했습니다.
3. 내셔널 갤러리, 바로크 갤러리
내셔널 갤러리를 대표하는 그림을 다섯 가지만 꼽으라면 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한스 홀바인의 <외교관>, 폴 들라르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조지 스텁스의 <휘슬 자켓>,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꼽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구름 인파가 몰려드는 곳입니다. 덕분에 여느 미술관이라면 최전방 공격수일 바로크 갤러리에서는 상대적으로 쾌적하게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16~17세기의 거장 카라바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에 이어 요하네스 베르메르까지 이 다섯명의 대표작을 모두 소장한 미술관은 유럽에서 내셔널 갤러리 뿐인 것 같습니다. 저의 1년 동안의 미술 여행은 공교롭게도 이들의 작품을 가장 중점적으로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이 갤러리에 들어섰을 때는 많은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벨라스케스의 <로케비 비너스>가 왜 희귀한 작품인지 알 수 있었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이 왜 영국에서 그려졌는도 알 수 있었죠. 카라바조의 후기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에서는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습니다. 유디트의의 귀에 걸린 검은 리본과 진주 귀고리였습니다. '여잘알(여성을 잘 알고 그리는 화가)' 카라바조의 비밀을 다시 한 번 엿본 것 같았습니다.
런던에서 10번 남짓 관람을 하면서도 내셔널 갤러리는 다시 찾을수록 더 좋아지는 미술관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에바 곤잘레스와 아돌프 멘젤, 페르디낭 호들러, 로렌스 알마-타데마와 같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화가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 미술관은 우연한 만남과 새로운 발견이 언제나 찾아왔고, '최애'의 안부가 궁금해 다시 그 방을 찾게 만드는 곳이었죠. 다음에 런던을 오더라도 저는 가장 먼저 이 곳을 찾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