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슬기로운 미술여행입니다.
에스토니아아에서 시작해 핀란드, 스웨덴을 거쳐 노르웨이와 덴마크로 서쪽으로 향할수록 신기하게도 물가는 비싸지기만 했습니다. 7월이었지만 날씨는 점점 좋아졌고 해가 지지 않는 여름밤도 계속됐죠. 때마침 오늘은 서울 기온이 처음으로 영하로 떨어진 날이라, 지난 여름이 더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지난주에 운하뷰 미술관을 소개했으니, 이번에는 오션뷰 미술관으로 가봅니다. 피오르와 오로라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만난 유럽의 손꼽히는 '신상' 미술관이면서, 뷰로는 가장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64회 (2025.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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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미술관 12층에서 본 바다. 오른쪽에 보이는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는 시민들이 사랑하는 뷰 명당으로 갈매기들의 천국이다. 노르웨이 갈매기들은 사람이 가까이가도 꼼짝도 하질 않는다.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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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바다를 보려면 뭉크 미술관 12층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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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층의 거대한 모노리스, 뭉크 미술관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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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는 중앙역에 내려 광장으로 나오는 순간 눈 앞에 바다가 펼쳐집니다. 중앙역 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오페라하우스와 국립도서관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탁트인 바다를 보면 감탄하는 이들의 눈에 어김없이 들어오는 '강한 존재감'의 건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에드바르 뭉크 미술관입니다.
북유럽 화가 중 뭉크 만큼 유명하고 친근한 화가는 없을 겁니다. 덕분에 이 미술관도 북유럽의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 됐습니다.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임에도 2022년에는 연간 방문객수가 150만명을 돌파할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죠.
이 미술관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유산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 뭉크가 오슬로 시에 방대한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밝힌 뒤 설립된 이 곳은 노르웨이의 국가적인 야심이 투영된 곳입니다. 뭉크의 세계 최대 규모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죠.
뭉크의 작품 26,724점 중 약 1,200점의 회화, 7,050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18,322 점의 그래픽, 14점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 판화, 수천 점의 손글씨와 편지, 그리고 9830점의 개인 소지품도 관리합니다. 이를 포함해 이 곳이 보유한 소장품은 42,000점에 달합니다.
이 막대한 유산으로 뭉크의 걸작들은 바다를 건너 팔려가지 않고 이 도시에 온전히 보존됐습니다. 롤프 스테네르센(Rolf Stenersen), 아말두스 닐센(Amaldus Nielsen), 루드비히 라벤스베르크(Ludvig Ravensberg)를 포함한 주요 노르웨이 후원자들이 기증을 이끌면서 노르웨이 모더니즘의 역사적 맥락을 꿸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죠.
2021년 10월 뭉크 미술관은 에스투디오 에레로스(Estudio Herreros)가 설계한 비요르비카(Bjørvika) 해안 지구의 새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무려 60m 높이 13층 새 건축물은 개관 당시 큰 화제를 모았죠. 수변의 랜드마크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크기 만큼이나 형태도 독특합니다. 하나의 큰 돌덩이처럼 보이는 모노리스(monolith) 형태의 디자인을 띄고 있거든요.
13층 높이 오피스 빌딩을 연상시키는 통유리 외관 건물은 바다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더군요. 모든 유명한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또한 공개 직후 논란이 있었습니다. '못생겼다'는 비난을 받은거죠. 하지만 이 구부러진 모노리스는 '실존적 불안'을 상징하는 화가 뭉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전시는 7개 공간에 걸쳐 이어지는데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을 거듭해 오르다보면 12층에 닿게 됩니다. 레스토랑 입구가 있는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오슬로 수변의 모습은 정말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전으로 규모가 5배나 커지면서 뭉크 미술관은 정체성에서 변화를 맞이했죠. 뭉크를 보존하고 연구하는 미술관에서, 뭉크 이후 노르웨이 미술의 미래를 고민하는 미술관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저는 이번 방문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설 전시장을 관람하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키요시 야마모토를 비롯한 신진 작가의 특별전시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었거든요.
지난 11월부터는 뭉크 트리엔날레가 개막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올해로 두번째인 뭉크 트리엔날레는 예술과 기술에 중점을 두고 전시를 기획합니다. 2025년 주제인 <거의 언리얼(Almost Unreal)>은 신진 작가들을 대거 소개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시대를 탐구하는 전시를 펼쳐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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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작업실과 생애를 소개하는 공간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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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ocus : 절규를 만날 확률은 3분의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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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벽에 걸린 <태양(The Sun)>을 비롯한 초대형 작품이 걸린 6층.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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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Self-portrait>, 1985 ©Munchmuseet |
Edvard Munch <Night in Saint-Cloud>, 1892 ©Munchmus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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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Melancholy>, 1900–01 ©Munchmuseet |
Edvard Munch <The Sick Child>, 1927 ©Munchmuse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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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미술관 전시장 내부 전경. ©Munchmuse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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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는 60년이 넘게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괴력의 화가였습니다. 1880년대에 데뷔할 때부터 1944년 사망할 때까지요. 이 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만 3만여점 가까이 되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병에 걸려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겨울 내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대신 집에서 교육을 받았죠.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의 열정을 추구할 자유도 주어집니다. 그는 17살 때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이제 화가가 되는 것이 제 결정입니다."
그의 삶을 시시콜콜 소개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삶에는 재미있는 지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뭉크의 빌라에는 늘 그림, 도구,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요. 그림은 야외에 보관되기도 했고, 작품에는 발자국과 새똥, 촛농 흔적도 발견됩니다. 열정적인 사진가였던 먼크는 수많은 사진을 남겼으며, 그중 다수는 자화상이었을 만큼 '셀카' 중동자였죠. 종종 싸움에 휘말릴만큼 불같은 기질의 소유자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개는 아주 좋아해서, 폭스테리어인 피프스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미술사적으로 뭉크는 1890년대 상징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다가, 1900년대 초반부터 표현주의 예술의 선구자로 변신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자유분방한 화풍의 변천과 열정은 그의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따라가면서 만나면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이 오늘도 설득력을 가지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뭉크의 그림이 당대에 비판적 평가를 받았던 이유 중에는 미완성으로 보인다는 점이 있었죠. 하지만 이 거칠고 미완성처럼 보이는 표현주의 화법은 인간 감정의 어두운 지점을 드러내는 점에서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홀로 선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집요할 정도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우울과 고독을 탐구하는 화가였죠. 예술가 자신이 침잠하며 탐구했던 고독과 고립에 관한 시각은 21세기 현대인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우울함이란 감정을 그림에 담아낸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15세기 말까지 우울한 기질은 바람직하지 않고 고쳐져야할 병증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예술가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었던 '멜랑콜리'는 점차 다양한 창작 활동과 연관되어 발전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신비로운 판화 <멜랑콜리아 I>에서 우울함을 시각적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절정에 달했죠. 뭉크의 <멜랑콜리아> 또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뭉크의 또 다른 특징은 병과 죽음에 집착했다는 점입니다. 뭉크가 14살 때, 누이 소피가 결핵으로 사망한 일을 겪었죠. 뭉크는 이 경험을 결코 잊지 못했고, 평생 이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885년에 처음으로 소피의 죽음을 그렸다. 그의 모델은 병약한 어린 소녀로, 아버지의 환자 중 한 명이었죠.
이 그림은 1886년 노르웨이 가을 박람회에 공개됐습니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렸죠. "자신의 작품을 손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몇 평론가는 이 어두운 그림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슬픔과 고통이 느껴지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 상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병든 아이>는 뭉크에게 돌파구가 되어 오늘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됐습니다. 뭉크는 평생 이 모티프를 반복해 그렸고, 62세에 그린 작품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6층 Edvard Munch Monumental 전시장에는 특별한 작품이 있는데요. 뭉크의 정말 집채만한 초대형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태양(The Sun)> (1910~11) 및 <연구자들(The Researchers)>과 같은 이러한 대규모 작품은 1909년에서 1916년 사이에 오슬로 대학 강당을 위해 제작된, 뭉크 경력에서 가장 까다로운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바지선에 실어서 옮겼을 정도로 까다로운 '이사'를 거쳐 이곳에 소장됐습니다. 뭉크의 작품이 아무리 많은 미술관에 있다고 하더라도, 오슬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감정을 선사합니다. 오슬로에 온다면 놓쳐선 안될 볼거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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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The Scream>, 1910 ©Munchmuse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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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의 방에서 숨어 있던 <절규>의 원화가 공개되는 순간의 관람객들. 모나리자 사이즈를 생각했다가 실제로는 커서 인상적이었다. ©김슬기 |
뭉크 뮤지엄의 세 가지 버전 <절규> ©김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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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 중 하나이자 불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절규(The Scream)>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제가 오슬로에 도착하자마자 이 곳을 처음으로 찾은 이유는 밤 9시까지 미술관이 문을 여는 탓도 있었지만, 스케치나 모작이 아닌 가장 유명한 <절규>의 오리지널 원화부터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1. 절규는 몇 점이 그려졌을까
뭉크의 절규는 해질녘 두 친구와 함께 한 산책에서 탄생했습니다. 바다를 물들인 노을은 뭉크에게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무관심했죠. 그는 이 일을 종이에 몇 자의 메모와 이미지로 기록해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여러 버전의 <절규>가 탄생했습니다. 뭉크는 하늘의 패턴을 다양하게 표현한 석판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석판화가 인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개로 추정되며 뭉크가 손으로 채색한 것을 포함해 이 중 6개는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2.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아무도 몰라
<절규>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수수께끼입니다. 일그러진 인물에 대한 완벽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죠.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배경의 인물들은 비록 아주 작지만, 이 그림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 모르죠.
뭉크가 세 사람을 직선의 길 위에 배치했습니다. 두 사람이 맹인도 귀머거리도 아니라면, 일그러진 인물의 비명에 반응할 수밖에 없을텐데, 뒤돌아보지 않고 있죠. 소통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은 뭉크 자신이며, 멈춰 주변을 둘러볼 때가 되었다고 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3분의 1 확률로 만나는 절규
여러 버전의 <절규>가 제작되었지만 대다수가 매우 취약한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원화, 드로잉, 판화 모두가 불안정한 재료를 포함해, 극도로 어두운 조명과 온도 조절이 가능한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됩니다.
미술관은 절규의 세가지 대표작인 회화(템페라), 드로잉, 석판화의 세 가지 버전을 30분 간격으로 순환 전시됩니다. 미술관 문이 열린 낮 동안에도 이 그림들에게는 휴식이 보장되는 셈이죠. 세 작품 중 어떤 작품이 공개 될지는 랜덤이라서 운이 없는 관람객은 원화를 보기위해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절규>는 노르웨이의 다른 미술관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초기 버전(1893년 작)은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또 다른 대표작인 <마돈나(Madonna)>와 <삶의 춤(The Dance of Life)> 등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죠.
사실 뭉크의 초상화전을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만나기도 했고, 취리히 미술관에서도 그의 대단한 컬렉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다작의 화가였기에 유럽 미술관에서는 누구보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작가여서, 호기심이 크게 일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뭉크 미술관의 그의 방대한 작품과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만나고나니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그를 만나면 오슬로라는 도시가 떠오를 테고, 시간이 갈수록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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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는 미술관이 많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곧 다시 만나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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