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피요르드를 볼 수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소장품 상설 전시실로 들어가봤습니다. 감탄이 나올만큼 화려한 동시대 미술 컬렉션이 펼쳐집니다. 노르웨이는 미술관마다 특색이 뚜렷하지만, 이 현대 미술관은 피겨 여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꾸준히 세계적인 작품을 모아온 수준 높은 컬렉션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페르낭 레제, 파울 클레, 파블로 피카소, 피에르 보나르 같은 근대 거장의 이름을 만날 수 있었지만, 동시대 작가들도 충분히 다양하게 걸려 있더군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계절에 어울리는 작품을 엄선해 선보이는 전시였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캐서린 오피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가을에는 아드리안 게니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토마스 스투르스, 여름에는 안드레아스 거스키, 빌헬름 사스날, 봄에는 아니쉬 카푸어 등이 나란히 걸려 있는 식이었죠.
아드리안 게니는 처음 만나는 독특한 도상이 있어서 반갑더군요. 2009년작 <뒤샹의 장례식 I>은 꽤 거대한 캔버스에 관에 누운 거장의 모습이 보입니다. '개념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며 회화에 죽음을 선고했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장례식을 상상해 그린 작품입니다. 어두운 색감의 캔버스에는 카메라와 손이 보입니다. 두텁게 바른 물감과 나이프의 사용과 같은 게니 특유의 표현이 돋보였죠. 게니는 이 그림을 통해 회화 장르가 살아있음을 선언하는 듯 했습니다,
이 미술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는 이는 독일 예술가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입니다. 미술관 내부에 하나의 방을 차지하고 영구적으로 전시되고 있었죠. 슈비터스는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며 소리, 텍스트, 이미지, 건축, 콜라주, 회화 등을 활용한 당대의 혁신적인 예술가였죠. 그는 이 작업 방식을 '메르츠(Merz)'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다다이즘 잡지 <메르츠>를 발간했는데요. <메르츠>에서는 과거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고 명백하게 '반예술'을 선언했고 그가 만든 조각 작품에는 길거리에서 주워 모은 판자나 잡동사니 등이 사용됐죠. 이 작업들은 콜라주 조각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1937년 나치 독일의 정치적 핍박이 심해지면서 유대인인 작가는 하노버에 노르웨이로 도피를 해야했습니다. 같은 해 그의 메르츠 아트는 뮌헨에서 열린 나치 전시회에 소개됩니다. 이로 인해 슈비터스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아내 헬마는 하노버에 남게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헤니 온스타드 아트센터는 독일 밖에서는 가장 방대한 슈비터스의 컬렉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가 노르웨이에서 제작한 작품과 함께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그에게 영감을 받은 작가의 작품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작가는 폴란드-로마니 예술가 마우고자타 미르가-타스(Małgorzata Mirga-Tas)였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수집한 식탁보, 커튼, 옷 등의 일상적인 직물 재료를 사용하여 패치워크 스타일의 생생한 초상화와 역사 속 이야기를 새겨넣는 작업을 합니다.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편견에도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왔죠.
소수민족 로마니 예술가로는 최초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폴란드관 대표로 참여한 작가입니다. 베니스에서 선보인 기념비적인 직물 연작인 <세계에 다시 마법을 걸다>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받은 12개의 대형 패널로 구성되어, 역사적 장면과 현대 로마니인의 일상을 병치하여 새로운 서사를 제시했죠.
저는 맨체스터 휘트워스 미술관에서 그녀의 개인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노르웨이에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가웠습니다. 초대형 태피스트리가 천정에서 바닥까지 드리워져 있더군요. 직물에는 올올이 여성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베니스에서 소개됐던 12명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다시 재조명되고 있었습니다. 소냐 헤니가 남긴 미술관에 잘 어울리는 근사한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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