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로 뒤덮인 숲 속 미술관을 떠난 지 1시간만에 나타난 미술관의 첫 인상은 비슷했습니다. 초록초록한 작은 저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유명한 미술관이 이렇게 작을리가 없는데... 혼자말을 하며 실내로 들어갔더니 티켓 판매소와 안내를 위한 로비가 있더군요.
여행기간 내내 정말 알뜰살뜰 사용했던 코펜하겐 카드를 보여주고, 입장하자마자 갑자기 180도 다른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작은 저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통로 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입구를 통과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꽤 큰 규모의 서점과 아트숍이 꾸며져 있더군요. 1층의 목이 좋은 곳에는 열 권 남짓한 책이 탑처럼 잘보이게 쌓여 있었는데요. 늦여름 8월에 열리는 문학 축제에 초대된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탑이었습니다.
<인터메초>로 온 유럽을 휩쓸고 있는 슈퍼스타 샐리 루니, 미국의 아프리카계 문학을 이끄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등이 그해 루이지애나를 찾는 작가들이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이런 (거짓말 조금 더해서) 노벨문학상급 라인업의 문학축제를 여는 건 반칙아닙니까. 예정된 행사 프로그램을 보니 황석영 선생님도 계시더군요.
문을 열고 탁트인 정원으로 나오는 순간, 감탄이 터져나왔습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말그대로 자연 속의 미술관이 펼쳐졌거든요. 광활한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이 아늑한 정원에는 눈을 돌리면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외레순 해협의 바다가 보였고요. 이런 곳에 이런 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증부터 생겼죠.
미국도 아닌 북유럽에 붙여진 루이지애나란 이름이 낯설었습니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의 이전 소유주였던 왕실사냥단의 장교였던 귀족 알렉산더 브룬의 세 아내 이름이 모두 '루이즈(Louise)'였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겁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놀라운 사연이라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1958년 세워졌습니다. 치즈 사업가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크누드 W. 젠슨(Knud W. Jensen, 1916~2000)은 1955년 덴마크 해안의 25에이커(3만평) 규모 부지에 자리한 '놀라운 사연을 가진' 루이지애나 빌라를 매입했습니다.
처음부터 젠슨은 대중이 예술을 허세스러운 것이 아니라 관람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방식으로 접할 수 있도록, '영혼이 깃든 박물관'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현대 미술을 덴마크인들에게 더 친숙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죠.
그는 개관 이후 1995년까지 40년 가까이 미술관의 디렉터로 활동하며, 루이지애나를 "덴마크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많이 찾는 문화 중심지"(뉴욕타임스)로 키워냈습니다. 건축가 요르겐 보(Jørgen Bo)와 빌헬름 볼레르트(Wilhelm Wohlert)와 협력해, 건물과 주변 풍경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설계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빌라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건물을 레고처럼 하나씩 덧붙여 나갔죠.
각기 다른 개성의 건물은 마치 바느질로 하나로 꿴 태피스트리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집니다. 자연 속에서 튀지 않도록 지하 공간을 많이 사용하고 2층 이상으로 높이지 않아, 건물들은 전혀 존재감을 뽐내지 않습니다. 덕분에 건축과 자연, 예술은 완벽하게 어우러집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덴마크 예술에 집중하려 했으나, 이후 국제적인 현대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전시하여 루이지애나를 세계적인 현대 미술의 명소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미술계에 화두를 던지는 선구안이 좋은 전시를 꾸준히 하면서 이 덴마크 시골 미술관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죠. 스웨덴의 힐마 아프 클린트를 2014년 가장 먼저 대규모로 국외에서 소개한 미술관도 이 곳이었습니다.
덴마크 현지 언론은 "크누드 W. 옌센은 덴마크인들의 박물관 관람과 미술 감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훔레벡에 있는 그의 웅장한 박물관은 전국 박물관의 모델이 되었다"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부단한 노력 덕분에 기적처럼 코펜하겐에서 1시간 거리의 미술관은 덴마크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미술관으로 성장했습니다.
젠슨이 남긴 재미있는 유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우나 원칙(Sauna Principle)입니다. 이 원칙은 관람객에게 뜨거운 온탕와 차가운 냉탕을 번갈아 경험하듯 상반된 매력을 제공해 몰입도를 높이도록 원칙을 세웠죠.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이 원칙에 따라 연간 6~10회의 전시를 기획하며, 자코메티, 쿠사마 야요이 같은 거장(Hot)과 젊고 전위적인 현대 작가(Cold)의 전시를 균형 있게 구성하는 현대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집중과 이완은 예술과 자연을 번갈아 경험하는 동안에도 작동해, 우리의 감각을 깨우도록(Refresh) 설계되었습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종일 걷고 지쳤던 저는 카페로 달려가 오션뷰에 자리를 잡고 허기를 채웠습니다. 저처럼 연어 요리에 맥주를 마셔도 좋고, 덴마크 가정식 오픈 샌드위치인 스뢰레브뢰와 함께 커피를 마셔도 좋습니다. 카페에 앉아서 보는 바다 풍경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