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아일랜드를 한국과 같은 아픔을 가진 나라로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낍니다. 영국의 기나긴 지배를 받았던 역사 때문이겠죠. 덕분에 이 도시에는 매우 독특한 랜드마크가 있었습니다. 고층빌딩 하나 없는 이 평평하고 소박한 도시에 120미터 높이의 바늘 모양 탑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더블린 오코넬 거리에 있는 120 m 높이의 첨탑 스파이어입니다. 영국인 건축가 이안 리치가 설계한 이 뾰족한 은빛 첨탑은 1966년, 영국의 영웅 넬슨 기념비를 폭파한 자리 위에 2003년 세워졌죠. 아일랜드의 국내총생산이 영국을 앞지른 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은 이 곳에서 인증사진을 찍곤 합니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걸어 리피강을 건너면 도심 한복판에 캠퍼스가 등장합니다.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정치인과 유명인을 비롯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문호들을 죄다 배출한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 Dublin)이죠. 관광지가 많지 않은 더블린의 관광 1번지인 곳입니다. 이날도 역시나 시민에게 개방된 이 대학에 아무 계획없이 들어섰다가, 마침 재학생의 캠퍼스 투어 행렬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트리니티 대학은 켈스의 서가 아주 유명한데요. 9세기경 제작된 가장 유명한 채색 필사본 중 하나입니다. 라틴어 4복음서를 정교한 채색화로 그린 680쪽 분량의 책은 아일랜드의 보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더블린 올드 라이브러리에 소장되어 있는데요. 긴 줄을 서서 입장해야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20만 권의 고서가 보관된 서재 롱 룸(Long Room)도 사진 명소로 유명한데, 서가가 텅텅 빈 곳이 많은 도서관 서고는 기대만큼 멋지진 않았습니다.
뜬금없이 대학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 있습니다. 저의 새 책에 관한 약간의 '트리비아'를 들려주고 싶어서입니다. 에필로그까지 읽으신 분들이 있으신지? 저는 1년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더블린 여행을 앞두고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을 드라마로 정주행했습니다. 여러번 읽은 소설을 시각적으로 체화시키고 여행을 떠난 셈이죠. BBC 드라마는 사실 책보다도 더 섬세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명작입니다.
이날 만난 법대 4학년생 가이드는 학교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나오는 두 고풍스러운 건물 중 왼쪽 건물을 '천국', 오른쪽 건물을 '지옥'에 비유했습니다. 졸업생들이 결혼과 졸업식을 하는 곳이고, 오른쪽 건물은 장학금 시험을 보는 곳이어서입니다. 이 곳 학생들은 1학년을 마치면 하루 종일이 걸리는 장학금 시험을 치릅니다. 각 단과대별로 1명이 뽑힐까 말까하는 합격률 5% 미만의 극한의 시험입니다. 합격자에게는 막대한 특전이 지급됩니다. 학사와 석사를 합친 5년 전액 장학금+식비+일정한 생활비까지 지급이 되는거죠.
이 시험 합경생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오스카 와일드구요. <왕좌의 게임>의 치가 떨릴 정도의 악한인 조프리 바라테온을 연기한 잭 글리슨도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시험에 합격한 '흙수저' 코넬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됐죠. 가난 때문에 소울메이트 메리앤과 헤어졌던 코넬은 지갑 사정이 나아지면서 마침내 ‘그랜드투어’를 떠납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회화의 예술> 몇시간이나 멍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고 그의 삶은 다른 궤도를 향하기 시작했죠.
잔디밭에 누워 망중한을 보내는 학생 중에서도, 트리니티 학생들의 최애 카페 브레드41에 어렵게 자리를 잡아 잡았을때도 학생들이 샐리 루니를 읽는 모습을 몇번이나 만났습니다. 가이드를 해준 학생은 "올해 미국에서 트리니티 대학으로 온 유학생의 숫자가 3000% 늘었다"고 하더군요. 놀라운 문학의 힘입니다. (물론 드라마의 힘이 더 크겠지만요)
이날 늦게까지 더블린의 펍과 버스킹까지 구경하며 정도 많고 흥도 많은 아일랜드인의 진면목을 본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브람 스토커와 사무엘 베켓에 관한 무용담도 들을 수 있었고, 펍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와 제임스 조이스의 흔적도 곳곳에서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가 많은 <이토록 사소한 것들>의 클레어 키건의 책도 서점과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었죠. 트리니티 대학 주변 서점마다 자랑스러운 SBN(선배님)들의 책은 잔뜩 진열되어 있더군요. 더블린은 분명 작은 도시였지만, 문학팬에게는 정말 즐거운 여행지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