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은 줄을 잘 섭니다. 기차든 버스든 제 시각에 오는 경우가 드물지만, 정말 얌전하게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식당도 1시간씩 줄 서는 이들이 많습니다. VIP 입장이 시작된 9일 오전 11시에도 입장을 위한 줄은 거의 500m 가량 늘어선 것이 보였습니다.
일찌감치 페어장에 도착한 이들은 신기하게도 페어장에 들어서기는커녕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매일 보는 동료간에도 맥주 1잔으로 서너시간을 떠들 수 있을만큼 수다스럽거든요. 입구에 생긴 긴 줄은 페어에 대한 기대를 꽤나 부풀어오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트페어의 본질은 '장사'입니다. 슈퍼리치와 컬렉터들을 초대하며, 세계적 화랑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각자 최고의 작가와 작품을 걸고서 말이죠. 그래서 아트페어에서 관람객의 숫자, 전시의 완성도나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례없는 경제적 침체기였던 작년 가을에 비하면 금리가 꺾이기 시작한 올 가을은 경제적 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일겁니다. 그럼에도 상황은 복합적입니다. 프리즈 런던은 내우외환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올해 프리즈 런던+마스터스는 270개의 화랑이 참여했습니다. 20주년인 작년보다 20개 줄어든 숫자입니다. 덕분에 쾌적했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참가한 미술인들에게 들은 공통적인 소감이 몇가지 있습니다.
"역대 최악이었던 작년에 비하면, 그래도 판매는 기대보다는 선방한 편이다."
"영국 비자를 받기 어려워 중국 큰 손들이 오질 않았다. 이들은 모두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작년에 비해 부스 규모가 현저히 줄어든 것 같더라. 그래도 첫 날 방문자는 꽤 많았다."
"신진 화랑 참여가 늘어나서인지 재미있는 부스가 많아졌다."
"불황은 불황인가보다. 싸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도 비슷한 소감입니다. 장사는 재미를 못봤지만, 위기의 프리즈 런던이 쇄신을 위한 노력은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확대된 포커스 섹션을 통해 신진 작가들이 대거 소개된 겁니다.
입구쪽에 배치된 포커스 섹션에는 37개 화랑이 참여했습니다. 인기 만점 부스였던 코펜하겐의 Palace enterprise는 덴마크 작가 베네딕트 비에르의 <새들>(2017)이란 작업으로 125개의 펭귄 풍선을 설치했습니다. 소비주의가 인류세에 미치는 영향을 은유했다고 합니다. 기성품인 아기 펭귄이 뛰어다니는 모습은 글로벌 유통 시스템을 뜻합니다. 기후 변화로 희귀 동물들의 생존은 어려워지고 있죠. 히치콕의 영화 <새>처럼 자연의 복수를 하는 대신, 펭귄들은 그 한계를 받아들입니다. 프리즈 아티스트 어워즈를 수상한 로렌스 렉의 부스도 콘솔 게임으로 로봇을 조정하는 것과 흡사한 인터렉티브 아트였습니다.
아티스트-투-아티스트는 작가가 작가를 소개하는 부스입니다. 작년 양혜규가 소개한 김아영이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가 아닌 작가적 시각이 아트페어로 들어오는 건 신선한 시도 같습니다.
메가화랑들은 퍼포먼스나 이벤트처럼 부스를 꾸민 곳이 많았습니다. 리만머핀은 한국에서도 개인전을 연 빌리 차일디시가 조수와 함께 현장에서 라이브로 그림을 그려 작품을 파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그야말로 아트페어다운 퍼포먼스였죠. 덕분에 개막일 최고 인기 부스가 됐습니다.
톱화랑들은 일제히 힘을 빼고, 근사한 볼거리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우저앤워스는 찰스 게인스의 나무를 다채롭게 표현한 콜라주 평면 작업으로 솔로 부스를 열었습니다. 데이비드 즈워너에는 로즈 와일리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대형 회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가고시안은 본 전시와 마스터스 모두 솔로 부스를 열었습니다. "돈 버는걸 포기한건가?" 물었더니 누가 그러더군요. "이미 다 팔고 참가한거"라고. 가고시안은 프리즈 런던에 캐롤 보브의 조각으로 솔로 부스를 열었습니다. 녹슨 공사장의 철근을 그대로 옮겨서 세워놓은 듯한 모습은 이 부유하고 세련된 아트 페어에서 가장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마스터스에서는 미국 예술가 존 체임벌린의 조각과 호주 디자이너 마크 뉴슨의 가구를 결합해 우르스 피셔가 큐레이팅한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철제로 만든 미래에서 온 가구들은 마치 사이버펑크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화이트 큐브의 박서보, 모던 인스티튜트의 김보희 등 한국 작가를 만날 수 있는 해외갤러리 부스도 많았습니다. 이들 외에도 런던의 신생화랑 Carlos/Ishikawa에 전시된 이목하, Harald ST에서 전시된 김상우 등 뉴페이스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